북한 수해 탓 … 남북 정상회담 10월2일로 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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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8~30일로 합의됐던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정상회담이 34일 뒤인 10월 2~4일로 연기됐다. 회담 개최일을 열흘 앞둔 18일 결정됐다.

이날 오전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에게 "수해 복구가 시급하다"며 10월 초로 연기하자는 전통문을 보내 왔다.

정부는 오후 2시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 주재로 긴급 남북 정상회담 추진위원회를 열고 북측 제안을 수용한 뒤 회담을 10월 2~4일 열기로 결정했다. 회의 결과가 북측에 통보됐고, 북측은 다시 김 통전부장 명의로 좋다는 전통문을 보내 왔다.

남북 정상회담이 합의된 뒤 무산되거나 연기되기는 벌써 세 번째다.

1994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 정상회담은 김 주석의 돌연한 사망으로 무산됐다.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에 합의된 1차 정상회담은 대북 송금 과정의 '기술적인 문제'를 이유로 북측이 갑자기 하루 뒤로 연기했다.

이번 2차 정상회담 일정 연기도 북측 사정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남북한 정부가 공개한 정상회담 연기 사유는 천재지변이다. 이달 들어 북한 지방에 내린 집중호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한 조선중앙통신과 방송 등이 세계식량계획(WFP).국제적십자사연맹(IFRC)에 밝힌 피해 규모만도 사망 또는 실종자 303명, 이재민 8만8000여 가구의 30여만 명, 전체 농경지의 11% 침수 등이다. 평양에는 12~14일 580㎜의 집중호우가 내려 시내 지하차도가 온통 물에 잠겼다고 한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19일 "북한의 피해가 예상보다 심각한 것 같다"며 "북한 측이 회담을 연기하자며 보내온 전통문에도 수해 피해가 심각하다는 것을 절실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7년 만에 다시 열기로 합의한 남북 정상회담이 불과 열흘을 남겨 놓고 연기되자 의문과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다른 이유는 없겠냐는 것이다.

북한은 14일 열린 1차 준비 접촉에서 육로 방문에 합의했다. 14일은 평양에 집중호우가 내린 날이었다. 당초 정부는 북한 측 수해가 심각하다는 점을 감안해 육로 방문의 가능성을 작게 봤다. 오히려 최승철 북한 통일전선부 부부장은 "노 대통령의 방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며 육로 안을 쉽게 수용했다.

익명을 요구한 북한 문제 전문가는 "준비 접촉 때는 문제가 없다고 해놓고 며칠 뒤 수해 때문이라고 하는 건 납득이 안 간다"며 "정상회담 발표 뒤 남측의 반응이나 의제 협의 과정에 북측이 불만을 가졌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정상회담이 10월로 늦춰지는 것과 때맞춰 대선용이라는 의혹이 커지는 것도 정부로선 부담이다.

범여권은 9월 15일~10월 14일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전국 순회 합동 연설회를 연다. 여권 경선전이 한창 뜨거울 때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인 만큼 대선 판도에 미칠 파괴력은 클 수 있다.

한나라당은 이슈 주도력을 뺏길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임기 말이라는 특성을 감안할 때 정상회담 합의 사항이 제대로 이행될지도 논란거리다. 노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을 가급적 실무형으로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회담 준비팀에선 회담이 끝난 뒤 ▶경협▶문화▶스포츠 등 분야별 이행 프로세스가 전개될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회담이 10월로 늦춰진 만큼 대선과 맞물려 이 과정이 제대로 진행될지 의문이다. 10월이면 역대 대통령의 경우 극심한 레임덕에 시달렸던 시기다.

97년 11월 김영삼 정부는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구제 금융에 합의한 뒤에도 당시 김대중.이회창.이인제 대선 후보에게 다시 합의를 이행하겠다는 서명을 받아야 했었다.

박승희.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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