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간다>81.스페인 톨레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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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그때 갑자기 회색의 성벽이 황량한 언덕 위로 나타났다.두터우면서도 길게 펼쳐진 성벽 너머로는 뾰족한 첨탑도 보인다.가까이다가갈수록 첨탑 주위로 누런색의 기와지붕들이 드러난다.마드리드를 떠나 메마른 고원을 뚫고 난 길을 1시간 반 달려 만난 도시였다.그 전경을 한눈으로 조망할 수 있는 크기의 이 도시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같기도 하고,동화 속에서나 나옴직한 「왕자의 도시」같기도 하다.
톨레도(Toledo)였다.성벽의 한가운데로 나 있는 아치형 석문을 통해 도시 안으로 들어간다.문을 지나자 돌을 촘촘하게 박아 만든 로마식 길이 전개되었다.고도(古都)다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톨레도는 분명 고도다.그것도 스페인의 역사를 압축시켜 보여주는 「역사의 나이테」같다.로마인들이 기원전 2세기 이곳에 톨레툼이란 도시를 처음 세운데 이어 5세기 후반에는 이탈리아반도로부터 침입해온 서고트인들(서고트왕국)의 수도가 되 었으며,아랍인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한 8세기 초부터는 회교도들의 지배를받았다.1085년 알폰소 6세가 이곳에서 회교세력을 몰아낸 뒤론 4백년간 카스티라왕국의 수도로서 국토회복전쟁(레콘키스타:회교세력추방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회교세력이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간 16세기에 에스파니아왕국이성립되면서 수도를 마드리드로 넘겨주긴 했으나 로마가톨릭의 본산으로서의 지위는 여전히 지키고 있다.
이렇듯 톨레도는 회교와 기독교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무데하르」라는 독특한 건축양식에서 그 「조화로운 혼합」을 확인할 수 있다.
길이 가팔라지면서 앞으로 또 하나의 성문이 나타났다.「태양의문」이었다.거기서 일방통행의 좁은 길을 따라 얼마간 올라가니 4각의 알카사르성이 맞아준다.사각의 각 코너에는 각기 하나씩의첨탑을 거느리고 있다.입구 앞에는 꽤 넓은 테 라스가 있어 톨레도의 북쪽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다.성의 정면은 처음엔 왕궁으로 세워진 것이라 위풍당당한 느낌을 준다.
육중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간다.넓은 사각의 빈 공간이 펼쳐진다.그 중앙에 서 있는 이 성의 건설자 카를로스 5세(일명알카사르)석상만이 홀로 지키고 있을 뿐이다.이곳은 또한 스페인내전시 프랑코군과 인민전선군이 72시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그때 총탄을 맞은 벽을 마치 훈장처럼 보존하고 있으면서 그때의 처절했던 상황을 극화(劇化)하여 테이프로 들려주고 있다.그래서 훌륭한 관광거리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전쟁의 아픈 상처가 묻어있지 않은 부분 은 각종 무기들을 모아둔 무기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다음 코스는 톨레도의 가장 중심이 되는 대성당(카테드랄).전면을 장식한 고딕양식의 첨탑은 톨레도 최고(最高)의 건축물로서교회 앞에서는 그 끝을 볼 수가 없을 만큼 높았다.그러나 놀라운 것은 외부의 장식이나 건축미가 아니라 오히려 넓은 내부공간을 가득 채운 그림과 조각들이었다.기둥.벽면.천장.제단 어느 한 부분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정교하고도 화려한 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그들의 신심(信心)과 종교적 열정,예술적 재능을 총집결시켜놓은 것 같았다.
대성당의 건축이 시작된 해가 1227년이고 완성된 해가 1493년,그러니까 회교세력이 스페인땅에서 완전히 물러간 다음해였으니 성당의 건축과 국토회복전쟁과의 연관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톨레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 있다.톨레도를 역사의 도시로서뿐만 아니라 미술의 도시로도 이름을 날리게 해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엘 그레코(그리스사람이란 스페인어)가 바로 그 사람이다.에게바다 한가운데 위치한 크레테섬 출신으로 당시 크레테를 지배했던 베네치아(베니스)로 건너가 르네상스미술의 대가 티티안으로부터 그림을 배운 다음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야심을 갖고 짓기 시작한 산로렌소사원 건축작업에 참여하고자 31세(1577)의 나이로 마드리드를 찾았다가 왕의 심사에서 탈락,그만톨레도에 정착해버린 천재화가다.
그는 기독교의 정신세계를 특이한 화법을 구사하여 많은 걸작을남겼으나 당대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불우한 삶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는 톨레도를 사랑했고 또 빛냈다.다행히 20세기 초에 들어 그의 작품은 재평가돼「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제는 톨레도사람 모두가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엘 그레코의 작품은 대성당에도 여러 점 있으나 그의 대표작인「오르테가백작의 장례」는 산토 토메교회 안에 걸려 있다.그 그림은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한장의 그림 속에 매우 치밀하게 대비시켜 놓았다.그래서 사람과 자전거 정도가 지날 수 있는 대성당 앞의 좁은 길(햇볕이 너무 따가워 그늘을 만들기 위해 큰 건물 사이로 좁게 길을 만들었다)을 따라 얼마간 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작은 산토 토메교회는 톨레도여행의 필수코스인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톨레도의 명소는 톨레도시의 전경을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좋은 곳(특별한 이름은 없다)이다.그곳은 톨레도의 남쪽을 감싸고 동에서 서로 흐르는 타호강(이베리아반도 최대의 강)건너편에 있다.그곳에 서면 알카 사르도,대성당도,그리고 경사면을 따라 빽빽이 들어선 톨레도시민들의 가옥도 모두 볼 수 있다.정말 일품이다.엘 그레코도 이 모습을작품으로 남겨놓기까지 했으니까.그 그림을 보면 4백년 전의 모습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음을 알 게 된다.역사는 흘러가되 조금씩 옛것을 벗겨내고 그 자리에 새것을 조금씩,아주 조금씩 입혀가는 것임을 톨레도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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