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프라임 사태로 체면 구긴 사람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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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19면

서브프라임 소용돌이 속에 국내외에서 톡톡하게 체면을 구긴 사람들이 있다.

신호등 제대로 못봤다

그 첫 주인공은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이다. 34년의 월가 경험과 더불어 골드먼삭스 최고경영자(CEO)를 지내면서 공격적인 비즈니스 거래로 ‘망치’란 별명을 얻었던 그는 지난해 7월 취임 때 금융 불안을 다독일 적임자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최근 서브프라임 사태로 불거진 금융 혼란의 파고 속에서 그는 “경제의 기초체력은 튼튼하다”는 일반론만 강조하며 책임을 FRB에 넘기는 데만 급급하다고 미 언론들은 비판했다.

금융위기가 닥치면 전통적으로 FRB가 선발 구조대로 나서고, 재무부가 뒤에서 긴급대책 등으로 지원군이 됐으나 그런 모습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폴슨 장관을 포함해 재무부 관료들은 금융 불안에 대한 경고 발언을 쏟아놓았지만 경솔한 우려 발언이 시장의 불안심리를 키우는 형국을 빚기도 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지난주 “유동성이 풍부하다”고 말한 뒤 바로 다음날 FRB가 대규모 현금을 시장에 퍼붓는 우스운 장면이 연출된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린스턴대 앨런 블라인더(경제학) 교수는 “재무부가 대책을 내놓으려면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미 먼지가 쌓인 뒤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지적했다.

한국에선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빈축을 샀다. 그는 9일 서브프라임 사태가 확산되는 와중에 콜금리를 연 4.75%에서 5%로 올렸다. 증권가 애널리스트들도 ‘서프라이즈(surprise)’를 연발했다. 시장과의 교감(交感)이 없었다는 얘기다. 이 총재는 “유동성이 여전히 빠르게 증가한다”고 이유를 댔다. 시중에 넘치는 돈을 빨아들이려고 금리를 올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폭탄이 터졌다. 프랑스의 최대 은행인 BNP파리바가 서브프라임과 관련한 펀드의 환매를 중단하면서 글로벌 증시가 폭락한 것이다. 한국 코스피도 4% 넘게 떨어졌다. 금융연구원 신용상 거시경제팀장은 “누구도 파장을 심각하게 짚어내지 못했으니 한은도 변명할 여지가 있다”며 “다만 한두 달 정도 더 지켜볼 수 있었을 텐데 서브프라임 사태를 과소평가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했다. 시장에선 이 총재가 한은의 위상 강화를 위해 목에 너무 힘을 주다가 ‘역(逆)주행’을 했다고 수군댄다.

막은 여기서 내리지 않았다. 이번엔 권오규 경제부총리가 일을 냈다. 난데없이 ‘환란(換亂)’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꺼내 가뜩이나 위축된 투자심리에 찬물을 더 끼얹었다.

14일 재정경제부 직원 게시판에 올린 글이 도화선이었다.

이 글은 일본 은행들이 1997년 한국에 빌려준 돈을 한꺼번에 회수하면서 외환위기를 불렀는데, 엔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빠르게 회수되면 비슷한 혼란이 찾아올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자 재경부의 ‘영원한 대책반장’으로 통하는 김석동 재경부 차관이 나섰다. 그는 16일 정례 브리핑에서 “부총리의 지적은 한국의 경우가 아니라 일부 국가의 경우 우려가 있을 수 있기에 그에 따른 국내적 파급영향도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명했다. 주가 하락에 대해서도 “금융시장 전체적으로 동요는 없다”고 했다. 물론 정부는 서브프라임 사태가 번질 경우 대책을 내놓겠다고 구두로 안심을 시켰다. 그러나 말발은 먹히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권 부총리와 김 차관의 언급 이후 16일 코스피 지수는 사상 최대인 125포인트가 폭락하면서 투자자를 심리적 공황으로 몰고 갔다.

시장에선 상황 파악이 잘 안 되고 대책이 없으면 가만히 있어 주는 게 최상이란 비아냥의 소리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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