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을살리자>17.고추-외국산 흉내못낼 맵고 단맛 조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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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고추 흉작으로 값이 폭등했던 84년 가격 안정을 위해 인도.
태국 등지에서 수입한 고추 1만9천t이 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경매에 부쳐졌던 일이 있다.
당시 전국 곳곳에서는 고추 사재기 등으로 아우성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수입고추 경락가격은 의외로 국내산의 3분의1정도인 근당 7백~8백원이 고작이었다.
78년 수입했던 고추가 제대로 건조되지 않아 쉽게 썩어버리는바람에 이에 대한 불신감이 있었던데다 수입고추들이 맵기는 하지만 토종고추에 길들여진 우리 입맛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중에서도 일반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추의 맛이 단순히 매운 정도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국내 각 연구기관이 고추에 대한 성분을 분석한 결과 토종고추는 물론 토종을 개량한 모든 고추들이 외국산에 비해 매운 맛을내는 캡사이신이 3분의1,당분은 2배정도 더 들어 있는 것으로밝혀졌다.
한마디로 토종고추는 고추 본연의 매운 맛에 참외 정도의 단맛을 적절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외국사람들이 늘 이상하게 여기는 일이지만 우리네가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식습관도 토종고추의 이같은 특성 때문이다.
게다가 외국산에 비해 무기질.유기산.비타민 등이 많이 함유돼있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비타민 C는 감귤류의 두배,사과 보다는50배나 더 들어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내 재배 역사가 얼마 되지 않는 고추가 이처럼 외국산과 달리 뛰어난 영양식품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국내 기후.풍토에 적응하면서 품종이 자연적으로 개량돼온데다 인공적으로도 김치용에 맞는 품종을 개발,재배해 왔기 때문이다.
4백여년전부터 이 땅에 재배되기 시작한 고추는 김치양념 등으로 인기를 끌면서 확산돼 전국 곳곳에서 심어졌으며,그중에서도 특히 경북.충북지방이 특산지가 돼 왔었다.
개화기.착과기에 일조시간이 길어야 생리적 낙화와 낙과 현상이줄어들고,일교차가 심해야 낮에 탄소동화작용으로 만들어진 영양분이 밤새 거의 소비되지 않고 축적돼 당분 함량이 높고 우수한 품질이 생산되는 특성과 이들 지역의 자연조건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중 경북지역은「대화초」「칠성초」「수비초」「칼미초」「화봉초」「풍각초」등 뛰어 난 토종이 재배되는 유일한 지역이기도 하다.
통칭 영양고추로 불리는 경북영양군의 특산물인 수비초.대화초.
칠성초는 품질이 그중에서도 우수한 대표적 토종고추다.
고추가 길고 칼처럼 생겨「칼초」라고도 불리는 수비초는 단맛이뛰어나고 매운 맛이 적으면서도 독특한 향기를 지니고 있으나 역병에 약한 게 흠이다.
조생종으로 긴 원추형인 대화초는 다른 품종에 비해 단단하고 웬만해서는 잘 곯지 않으면서도 윤기가 뛰어나 김치 양념으로 사용할때 물이 많이 나와 주부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또 허리 부분이 불룩하게 생겨「붕어초」라고도 불리는 칠성초는단맛이 많고 말릴 때 쪼그라들지 않는가 하면 잘 자라고 질병 저항성이 뛰어난 품종.경북 청도군 일대에서 재배되고 있는 풍각초는 길이가 길고 살이 두꺼워 고춧가루가 많이 나고,매콤 달콤한 맛이 일품이어서 6.25 직후까지만 해도 서울.부산등 대도시 고추시장에서 인기를 독차지했던 품종이다.
이밖에도 질병에 강한「홍일품고추」「추래홍고추」,맵고 당도가 높아 맛이 뛰어난「제주재래」,저온에서 잘 성숙해 풋고추로 인기가 높았던「승촌재래」「동래 서동재래」와「무주재래」「고성재래」등1백여종의 토종고추가 있었다.
그러나 여러 토종들중 특산물로 지정돼 재배되고 있는 수비초와칠성초를 제외하곤 거의 사라져버렸다.
고추가 벼 다음으로 중요한 농가 소득원으로 자리잡은 70년대이후 각 종묘회사들이 잡종 강세를 이용한 교배품종들을 개발,전국적으로 보급하면서 토종들이 사라지기 시작해 지금은 텃밭 등에서 맛보기로 심어지는 것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됐 다.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로 콜럼버스 일행에 의해 스페인(에스파니아)으로 건너간뒤 급속히 전 세계로 전파된 고추가 국내에 들어온것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께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1614년 실학자 李수光이 펴낸 백과사전『芝峰類說』중「南蠻椒(고추의 이명)는 倭國에서 도입된 까닭에 왜개자로도 불렸으며 가끔 이것을 재배한다」는 고추에 대한 첫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고추는 국내에 들어온 이후 고초(苦草.苦椒).당초(唐椒).번초(番椒).남만초(南蠻椒).왜개자(倭芥子)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며 경기도.황해도.평안도 지역에서는 당추 또는 고추,경상도.전라도에서는 꼬치라고 부르기도 했다.
1715년 실학자 洪萬選이 저술한 농업서적『山林經濟』에는 중국에서 도입된 고추 종자의 특성과 재배적지.재배법 등이 자세히적혀 있는 점으로 미뤄 고추는 일본에서 처음 도입된 뒤 중국에서도 종자가 반입됐으며 18세기 초에 재배가 일 반화된 것으로보인다. 또『農家月令歌』에도「마늘.생강.파와 함께 고추는 필수적인 김치 양념」이라고 기록돼 김치가 세계적인 식품으로 발전하게 된데에는 고추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김치의 맛을 내는데 있어 배추나 무 못지 않게 고추가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이 돼 버렸지만 최근들어 일부 식품영양학자들은 김치의 맛과 발효 정도를 고추가 결정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실제로 김치에 젓갈류를 넣게 된 것은 고추가 들어 온 이후인17세기 말부터로,이는 고추의 매운 맛을 내는 캡사이신에 젓갈류의 酸敗를 막을 수 있는 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고추씨가 붙어있는 흰 부분인 胎座에 주로 들어있는 캡사이신은기름의 산패를 막고 젖산균의 발육을 돕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김치에 고추와 함께 젖갈류를 사용했던 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이는대목이다.
***한때 제2의 作物 고추는 또 감기에 걸렸을때 감주에 고춧가루를 타 마시는「구추감주」등 민간요법제의 구실도 톡톡히 했다. 고추는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쌀 다음으로 중요한 농가 소득원이었으며 83~87년 사이에는 쌀.소.돼지 다음의 네번째소득원이었다.
재배면적이 줄어들고 가격이 떨어진 최근에는 8~11위를 차지하고 있으나 고추는 아직도 전체 채소 재배면적의 23%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시장개방을 눈앞에 두고 학자들이나 농민들 모두 고추농사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값으로만 비교하면 국제경쟁력이 외국의 4분의 1에 불과하고,91년 국내시장에 첫 선을 보인 중국 山東省의 益都품종중 일부는 국내 고추와 질이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가공용 시장은 내 주더라도 토종고추를 본격적으로 개량해 내병성이 뛰어 난 신품종을 만들어 연간 6~10회 사용하는농약을 줄이면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학자들과 종묘회사 육종연구가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게 제기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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