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⑧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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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손을 잡아야 비로소 사랑이다”
기계문명 너머를 꿈꾸는 시인의 노래

시인 이문재는 목하 도모 중이다. 무언가를 꿈꾸고 있고, 무언가를 도발하고 있다. 그 무언가의 전모가 드러난 건 아직 아니지만, 단서는 이미 우리 앞에 놓여있다. 손이다. 이문재의 올해 시편을 돌아보는 건 ‘가슴 앞에서 가지런해지는’ 두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다.

단서가 던져졌으니 단서가 가리키는 바를 좇아야 한다. 하나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시인이 처한 현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시인은 지금 현실 너머를 상상하고 있고, 그 너머를 향한 모종의 공작을 진행 중에 있다. 다행히 시인은 여러 시편에다 삶의 흔적을 남겨두었다. 그 증거들을 종합해 시인이 처한 현실을 재구성한다.

시인이 사는 세상은 가령 이러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과 더불어 더 가난해지고 도시는 흡반을 들이대 시골의 피를 빨아먹고 인류는 행복보다 불안을 더 친해하고’(‘수처작주’에서 인용).

시인이 사는 하루는 또 이러하다. ‘아침이 아니고 출근시간이라고 말해야 한다. 내 입술을 다른 입술에 포갠 적이 언제였던가. 충전은 휴대전화 밧데리에게만 쓰이는 말이었다.’(‘제국호텔 - 우리, 기계보다 기계적으로’에서 인용)

시인이 사는 처소는 이를 테면 이러하다. ‘햇볕 들지 않는 북향 키울 수 있는 화초는 산세베리아뿐 일곱 평짜리 오피스텔 9층 혼자 산다는 것은 일인용 일회용과 더불어 사는 것 접이식 침대를 펴고 텔레비전을 켜고 나는 나를 껐다’(‘산세베리아’에서 인용)

이처럼 답답한 공간에 시인이 갇혀있다. 산세베리아만 겨우 숨 쉴 수 있는, 행복보다 불안이 더 친숙한 제국호텔 안에 시인은 수용돼 있다. 이제 시인은 탈출을 선언한다. 탈출의 수단은, 물론 손이다. 한데 왜 하필 손인가. 이 해답 역시 시편에서 찾을 수 있다.

‘옆에 앉는다는 것은/손으로 만지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자본주의가 창궐하고 있는 여기까지가/남자의 시대, 시각의 시대였다./눈을 감으면 남자가 사라진다.’(‘아주 낯선 낯익은 이야기’ 부분)

‘사랑은 손에서 시작한다./사랑은 손이 하는 것이다./손이 손을 잡았다면/손이 손 안에서 편안해 했다면/…/사랑이 두 사람 사이에서/두 사람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아직 손을 잡지 않았다면’ 부분)

자본주의 시대는 시각의 시대다. 그 시각 독점주의에서 풀려나야 한다고, 그래서 촉각을 부활해야 한다고 시인은 외친다. 여기서 다시 질문. 왜 굳이 촉각일까. 시인은 “가까이 다가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시각은 멀찌감치 서있어도 작동하지만, 내 손은 당신의 옆자리에 앉은 다음에야 당신의 손을 잡을 수 있다. 그러니까 손은 결국 사람이고, 사랑이다.

김수이 예심위원은 “문명비판 메시지를 연애시처럼 풀어낸 시인의 감각이 돋보인다”고 평가했고, 시인은 “이미지와 메시지를 합한 ‘이메시지(Imessage)’의 작업을 시도했다”고 설명했다.

오늘, 잠깐 눈을 감자.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자. 그래야 비로소 사랑이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환상 속 세계에서 발견한 진정한 자아
냉소가 사라진 곳엔 고독한 내가 있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1995년 은희경은 첫 장편 『새의 선물』 앞머리에 열두 살 소녀의 당찬 냉소주의 선언을 앞세웠다. 영악한 소녀 강진희는 냉소라는 방패로 자신을 가렸다. 냉소는 차가운 웃음이다. 차갑게 웃으려면 주위와 거리를 두어야 하고, 상대보다 우월한 척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떼어놓아야 한다. ‘자아 분리’란 은희경의 오랜 주제는 이와 같은 경로로 만들어졌다. 『새의 선물』 이후 냉소는, 은희경 소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세월이 흘러 올해, 황순원문학상 최종 후보작 ‘고독의 발견’에서 은희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를 그다지 많이 알지 못한 채로 서른여덟 살이 되었다.”
 
주인공은 “나는 공부 외에는 할 줄 아는 일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고 털어놓는 만년 고시생 K다. ‘못난 나’의 정체가 드러나고 말았으니, 열두 살 진희처럼 냉소를 지어 보일 수도 공주 노릇을 할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고독의 발견’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 길을 떠나는 구도 소설의 면모를 띤다. 그 여행길 곳곳에 소설적 장치가 매복해 있는 건 당연하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를 만나 낯선 경험을 하는 건 ‘길 떠나기 소설’의 익숙한 문법이다.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나 보이고 싶지 않은 자신이 있다. 과거의 자신은 대체로 화려하게 반짝거리게 마련이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도 내 탓은 아니다. K 역시 마찬가지다. 거듭 고시에 실패했지만 그래서 삶은 갈수록 쭈그러들었지만, 그는 늘 ‘뭔가 잘못됐지만 누구에게도 잘못은 없다’고 자위하곤 했다.

이런 K가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 익숙하고 분명한 바로 여기에서가 아니라 꿈 속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되는 W라는 곳에서다. 거기에서 K는 난쟁이 여자를 만난다. 여자가 평범한 용모가 아니란 점도 중요하다. W는 현실이라기보단 환상 속 공간에 가깝다.

여자는 K에게 “세상에 나는 여러 개로 흩어져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다는 공상을 한다”고 말하고, 이어 그는 미처 자신이 몰랐던 자신의 다른 모습과 마주친다. K는 주위의 모두로부터 미움을 받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일 뿐이었다. 그랬다. 문제는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은희경은 이번 소설에서도 ‘자아 분리’란 오랜 주제를 붙들고 있다. 김형중 예심위원이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 사이의 분열이라는 은희경 소설의 기본 구도가 이 소설에서부터 다중적 분열로 더욱 확장되고 있다”고 바라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은 영 낯설다. 흐릿하고 애매모호한 세계, 똑 떨어지거나 정리되지 않는 이야기를 은희경 소설에서 읽는 건 흔한 일이 아니어서다. 은희경은 달라졌는가. 작가는 “그러고 싶다”고 답했다.

“나는 늘 너무 많은 것을 말해주고 명쾌하게 하려는 강박에 시달려 왔다. ‘고독의 발견’은 여기서 벗어난 작품이라 마음에 든다. 나는 계속 달라진다는 말을 듣고 싶다.”

글=권근영 기자, 사진=최금복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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