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북한.미국 관계개선 줄다리기 10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올해는 北韓이 美國과의 관계개선 용의를 밝힌지 꼭 10년이 되는 해다.
北-美관계는 지난해의 北韓의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탈퇴라는 핵문제를 계기로 정치적인 관계수립까지 점쳐지는 단계로 발전하는듯 했으나 핵문제가 다시 걸림돌이 돼 주춤거리다 또다시 핵문제 타결을 위한 막바지 분위기와 함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北韓의 핵문제는 이래저래 한국전쟁후 40여년간 적대관계를 유지해온 美國과 北韓의 대화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北韓과 美國의 그동안 접촉과정은 그러나 핵문제가 타결돼도 외교관계 수립이라는 정상적인 관계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을 것임을 말해준다.
北-美 관계는 크게▲77년 카터정부 출범▲88년 한국정부의 7.7선언▲작년 북한의 NPT탈퇴를 계기로 개선의 접점을 찾아왔다. 미국은 77년 카터행정부가 출범하면서 그해 3월 인권외교의 일환으로 내국인들의 북한 방문을 처음 허용했고 79년4월에는 美 탁구팀이 平壤탁구대회에 참가했다.
美國은 이와함께 그해 7월 北韓에 남.북한,미국의 3당국 회의를 제의했으나 북한이 직접 협상및 北-美평화협정 체결을 주장,성사되지 못했다.
양자관계는 이후 소강국면을 보이다 83년2월 레이건행정부가 외교관들의 북한 외교관 접촉을 허용하는「微笑전략」으로 새기류를맞았다. 美국무부는 당시『국제무대에서 북한외교관들이 접근해올 경우 종전처럼 피하지 말고 적극 대화하도록 지침을 내렸다』고 발표했고 이어 3월1일 북한人 입국비자 발급을 허용했지만 그해10월 터진 아웅산사건으로 북한외교관 접촉을 다시 금지 시켰다. 金日成은 그러나 84년9월 이시바시(石橋)일본 사회당 위원장에게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정식으로 희망했다.
이는 北韓의 공식적인 첫 對美관계 개선 손짓으로 기록된다.
85년10월 미국은 학술회의에 참석하는 북한학자 3명에게 최초로 입국비자를 발급했다.
미국은 87년3월 88서울올림픽의 평화적 개최를 위한 외교적노력의 일환으로 아웅산사건 이후 금지했던 북한외교관의 접촉을 다시 허용했다.
북한도 외교부대변인의 성명을 통해『장소와 형식.급에 구애받지않고 미국측의 공식 인물과 접촉,대화할 준비가 돼있다』고 호응,87년에는 양국 외교관 접촉이 처음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양자관계는 87년12월 북한의 KAL기 폭파사건으로 급랭 국면을 맞았다.
88년1월 미국은 이 사건으로 북한을 테러국가로 규정하고 무역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외교관 접촉의 지침을 철회하고,또 소련에 북한에 대한 군사원조 중지및 테러견제를 요청했다.
그러나 北-美관계는 북한이 美.日과 수교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한국정부의 88년 7.7선언이후 계속 호전돼왔다.
미국은 그해 10월 북한제재 완화책을 통해▲비공식 민간차원의訪美장려▲미국인들의 訪北제한 완화▲인도적 차원에서의 對北교역 허용▲북한 외교관 접촉 완화를 발표했다.
미국은 그러나 적성국과의 무역규제법및 수출관리법에 따라 북한과의 교역은 계속 규제하고 테러국가 지정도 현재까지 엄격히 지키고 있다.
88년12월6일 슐츠 美국무장관은『우리는 북한당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북한이 7.7선언에 건설적으로 대응하고,한반도.세계에 대한 도전정책을 포기한다면 북한과의 관계는 개선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같은 분위기에 따라 12월7일에는 중국 北京 인터내셔널클럽에서 양국 참사관이 접촉,北-美간에 첫 공식대화채널을 태동시켰다. 89년은 北-美간의 관계개선 논의가 본격화되는 원년이었다. 미국은 그해 1월 제3차 北京접촉에서 처음으로 북한과의 관계개선 5개 조건으로▲미군유해 송환▲휴전선일대 신뢰구축▲미국비난 중단▲남북회담의 진전▲테러행위 포기를 제시했다.
양자는 북한의 호응에 따라 1월에는 뉴욕에서 미군포로 유해 송환에 대한 첫 협상을 벌였고,7월에는 미국의 캐스턴 시거 前국무부 東亞-太담당차관보의 訪北이 이뤄졌다.
그러나 미국은 11월 제5차 北京접촉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핵안전조치협정 비준을 북한과의 관계개선 조건에 덧붙였다.양자관계에 핵문제가 끼어든 것이다.91년 들어서도 양자의北京접촉은 계속됐으나 북한의 IAEA 핵안전조치 협정 비준및 핵사찰 문제 거론이 본격화된 해였다.
92년1월22일 북한 金容淳당국제부장과 아널드 캔터 美국무차관이 유엔에서 고위급회담을 가짐으로써 양자관계는 새로운 전기를맞았다. 金-캔터회담 성사는 그해 1월 許鍾유엔대표부부대사가 CNN과의 회견에서『가능한한 빠른 시일내에 핵안전조치협정을 비준하겠다』고 밝힌데 따른 것으로 북한은 그해 4월 핵안전조치협정을 비준하고 모두 여섯차례에 걸쳐 IAEA의 임시사찰을 받았다. 북한은 그러나 지난해 3월12일 NPT 탈퇴라는 초강수를통해 對美관계 개선에 새로운 출구를 모색했다.
양자는 그후 6,7월 뉴욕과 제네바에서 1,2단계 고위급회담을 가졌고 연말엔 막후접촉을 통해 핵문제 해결 돌파구를 마련했으나 북한과 IAEA의 사찰협상이 접점을 찾지 못해 對北제재가모색되면서 또다시 北-美 접촉에 한가닥 기대를 거는 상황이 된것이다. 핵문제 타결의 막다른 분위기가 北-美관계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주목된다.
〈吳榮煥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