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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시시각각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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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대 나온 여자야”가 윤석화라는 저명한 연극배우를 통해 현실에서 다시 한 번 곡예를 부릴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윤씨가 예전에 했다는 “너네들 공부 못했으니까 드라마센터(현재의 서울예대) 갔지. 나는 그래도 이대 출신이야”라는 말이 차라리 연극 대사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게다가 어제는 지상파 TV에서 아나운서를 지낸 원로 인사가 고졸 학력을 대졸로 속인 일까지 드러났다.

일부 인명사이트가 대졸이라고 잘못 기재하고 있는 황석영은 사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 동국대 철학과를 중퇴했다. 고교는 명문 경복고를 다녔지만 2학년 때 중퇴하고 동양공고 야간부로 옮겨 졸업했다. 좌충우돌 문학청년 기질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 작가는 오래전부터 이런 사실을 당당하게 밝혀왔다. 자전소설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에도 썼다. 그의 소설집 어디에도 ‘대졸’이라고 기재된 적이 없다.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은 고려대 영문과를 중퇴했다. 그 역시 떳떳하게 ‘대퇴’임을 밝힌다. 황석영은 최근 한 대학으로부터 석좌교수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 대학과 별 인연이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김훈은 저서의 학력 난에 아예 ‘고졸’이라고 못박기도 한다. 오연(傲然)한 결벽과 자부심이 엿보인다. 중졸의 장정일 작가가 대학교수로 부임한 게 무슨 학력 포장 덕분인가. 고교 졸업 후 프로구단에 입단한 이승엽은 나중에 대학도 마쳤지만 팬들에겐 ‘학사 이승엽’ 아닌 홈런 타자 이승엽이 더 소중하다.

결국 윤석화씨의 아킬레스건은 정직성이었다. 거짓말을 했거나 남이 자신에 대해 해놓은 거짓말을 오랫동안 묵인한 죄로 기약 없이 홍콩으로 떠났다. 윤씨와 함께 거짓에 대해 침묵한 이화여대도 겸연쩍게 됐다. 내가 아는 이대 졸업생 한 명은 “나 이대 나온 여자야”를 잊고 지낸다. 대학 시절 봉제공장 미싱사로 위장 취업해 노동운동을 하다 익힌 기술을 밑천 삼아 소규모 가내공장 주인으로 눌러앉은 김양희(45)씨다. 주변에선 그를 대개 ‘시다(보조공)에서 출발해 공장을 차린 또순이’로 알고 있다. 김씨는 “우리 업계에선 이대 졸업이란 학력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고 말한다.

그렇더라도, 우리 연극계에 끼친 공로를 생각하면 윤석화씨는 너무 아깝다. 아까워서 더 안타깝다. 문화예술계가 다른 동네에 비해 셈이 흐린 데다 그동안 ‘학력보다 실력’이라는 구실로 엄밀히 검증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다. 그런 풍토에서 “너는 이대, 나는 숙대”식의 가짜 학력이 통용됐을 것이다. 만약 윤씨가 처음부터 고졸 학력을 고백했더라면 지금 위치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완고하게 짜인 예술계의 학맥과 파벌을 뚫고 우뚝 섰을까. 아마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의 윤씨에게 “나 이대 나왔어”는 적지 않은 힘이 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 황석영·김훈 정도면 일개 대학이 아니라 대한민국 황석영, 대한민국 김훈으로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윤석화씨는 그 반열 직전에서 아킬레스건을 다쳤다. 그래서 얘긴데, 이 기회에 문화예술인 모두가 학력에 관한 일체의 윤색(潤色)과 거짓을 고백하고 털고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서 거짓말은 하지도, 용서하지도 않는 풍토를 가다듬으면 좋겠다. 윤씨로부터 “나 ‘신의 아그네스’ ‘명성황후’의 윤석화야”라는 말 못지않게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말도 듣고 싶어한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은가.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