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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가게] '아름다운 보따리' 1천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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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18일 오후 서울 성북구 장위1동 산 3번지 무허가 판자촌.

두평 남짓한 단칸방의 열린 문틈으로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이창림(75)할아버지는 허름한 대문을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손에 하얀 보따리를 든 벽안의 중년 여성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눈길을 뚫고 찾아온 이들은 조슬린 코모 주한 캐나다 대사부인 일행과 박원순 아름다운 가게 상임이사.

코모 여사 일행이 우리말로 더듬더듬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라며 쌀과 밀가루(3㎏).김치(1㎏).생필품 등이 담긴 '아름다운 나눔 보따리'를 건네자 李할아버지의 눈가가 붉게 젖어들었다.

*** 칠순 할아버지 눈시울

李할아버지는 "혼자 산 지 10년이 넘었고 고향이 이북이라 설이 전혀 반갑지 않았는데 외국분들까지 찾아 주니 올해는 설 기분이 난다"며 눈물을 훔쳤다. 코모 여사는 "한국 최대의 명절인 설을 앞두고 뜻깊은 행사를 한다기에 만사 제쳐놓고 달려왔다"며 李할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코모 여사 일행은 李할아버지 외에도 저소득층 자녀들의 배움터인 성북구 월곡동 월곡공부방과, 신부전증으로 고생하며 4남매를 홀로 키우는 김선순씨 등 성북구 일대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 따뜻한 마음을 전했다.

'중앙일보와 함께하는 아름다운 가게'가 배달 자원봉사자로 나선 시민 4백여명과 함께 불우이웃 1천명에게 '아름다운 나눔 보따리' 1천개를 전달한 18일은 '아름다운 일요일'이었다. 설을 앞두고 더욱 외로운 우리 이웃들은 선물꾸러미를 펼쳐 놓고 모처럼 함박웃음을 지었다.

6급 지체 장애인이면서 손자 3형제를 어렵게 키우고 있는 동대문구 회기동 전영기(57)-맹순분(58)부부 집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신한금융지주회사 박준석(32).박철우(31)주임 등이 보따리를 들고 찾아갔다. 이들은 아름다운 가게에서 마련한 보따리에 자신들이 따로 준비한 과자를 넣어 전달했다. 다섯살.네살배기 아이들은 "와! 과자다"라며 기뻐했다.

남편마저 지체 장애인인 맹씨로부터 "식당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4개월째 월세 40만원을 못내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는 하소연을 들은 이들은 "용기를 잃지 마세요. 저희가 계속 관심을 갖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게요"라고 위로한 뒤 발걸음을 돌렸다.

*** "용기를 내세요" 위로

또 경기도 일산 신도시에 사는 이종학(41)씨는 부인과 함께 직접 집에서 김과 떡가래, 멸치.참치 통조림 등을 넣어 만든 별도 선물꾸러미를 서교동 독거노인에게 전달했다.

온가족이 나눔 천사로 나서기도 했다. 아내와 딸 지현(9).지솔(8)이와 함께 마포구 창신동의 독거노인들에게 사랑을 전한 이종민(44)씨는 "아이들이 이웃을 돕고 봉사하는 예쁜 마음을 갖게 된 것 같다"고 흐뭇해 했다. 지현이는 "아빠.엄마랑 또 보따리를 들고 왔으며 좋겠다"며 노인들 앞에서 재롱을 떨었다.

개인택시 기사 조광수(趙光洙.44)씨는 근무 중 시간을 냈다. 趙씨가 마포구 노고산동 崔귀용(37.여)씨 집에서 꾸러미를 건네자 崔씨는 "더 어려운 이웃도 많은데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월세 12만원에 13평짜리 다세대주택에 살고 있는 崔씨는 식당일을 하며 다섯 식구 생계를 돌보고 있다.

*** "더 어려운 이웃 많은데"

한편 아름다운 가게는 당초 시민 2백명 정도가 이날 꾸러미 배달 자원봉사에 참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배달 꾸러미를 다섯개 정도씩 할당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진눈깨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이른 아침부터 승용차를 몰고 온 시민이 2백명에 이르는 등 봉사 희망자들이 4백명을 훌쩍 넘어서자 꾸러미 배당량을 1인당 한두개로 줄였다.

아름다운 가게 박원순 상임이사는 "선물은 충분히 준비했는데 배달 자원봉사자가 적어 선물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까봐 걱정했다"라며 "이런 시민들의 성원이 소외된 이웃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전익진.신은진 기자
사진=임현동 기자<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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