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드와 그랜저(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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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티코가 왜 빨리 달리는지 아니?』 『작은 차 탄게 부끄러워 얼굴 보이지 않으려고』 『프라이드는 왜 더 빨리 달리지?』 『티코보다 한수위라는 걸 과시하려고.』 밑거나 말거나 우스갯소리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속에서 웃지 못할 우리들의 저속한 의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자동차를 이동의 도구로 보지 않고 자동차를 모는 사람의 인격과 신분을 동일시하면서 작은 자동차와 인격체에 대한 멸시와 경시가 그 배후에 깔려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나라 작은 자동차는 소형승용차·국민차·경차라는 세가지 용어로 불린다. 배기량 1천5백㏄ 이하의 차를 총괄해 소형차라 하고 8백㏄ 이하는 경차라해서 좁은 도로와 주차장난이 심각한 우리나라에선 이들 소형차를 애용해야 한다는 뜻에서 국민차라 불렀다. 그런데 소형차들이 지난해부터 갑작스레 판매량이 줄기 시작했다. 92년까지만해도 소형승용차가 전체의 44.3%의 비중을 차지했는데 지난해 10월엔 31.2%로 무려 13%나 뚝 떨어졌다.
자동차가 사치품이 아닌 생활필수품으로 바뀌면서 자동차문화도 많이 개선되어가는 시점에서 자동차 판매추세는 거꾸로 소형취향에서 중대형으로 바뀌는 역현상이 일고 있다. 왜 그럴까. 자동차회사가 준중형 신차를 대거 출하시킨 까닭도 있겠지만 아직도 자동차를 신분화·인격화하고 작은 것에 대한 멸시풍조가 남아있는 탓이 아닌가. 그 예를 최근 재벌2세들이 벌인 폭력 행각에서도 보고 있다.
누구라면 다 아는 권력있고 돈있는 집자식들이 미국·영국 유학중에서 일시 귀국해서는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강남 카페를 누비다가 소형승용차가 끼어들자 「소형자가 감히…」라는 생각으로 시비를 벌여 뇌수술까지 가는 폭행을 저질렀다. 시비곡절을 가리자면 한이 없겠지만 맞은 쪽에서 본다면 다만 소형승용차가 분수 모르고 대형승용차 앞을 끼어 들었다는 이유밖에 없다. 돈없는 「소형」은 돈많은 「대형」 앞에 기죽어 지내야하며 권력없는 소시민은 권력자 앞에 숨죽여 지내야 하는 지난 권위주의 시절의 잘못된 의식이 2세 오랜지족 머릿속에 그대로 깊이 박혀있기 때문에 생겨난 사고였지 않은가.
자동차를 자동차로 볼줄 알고 사람을 사람으로 볼줄 아는 평범하면서도 올바른 눈과 마음이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문민시대로 넘어가는 의식변화여야 할텐데 그게 아직도 잘 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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