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탄생 백주년 맞은 중국(모시대 등시대: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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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념지상」서 「경제지상」으로/국가·국민 모두 「돈벌이」 한마음/“이젠 이상좇아 굶주릴순 없다”
마오쩌둥(모택동)시대에 수억의 중국인들은 매일 「소홍서」(모어록집)만을 학습했다. 덩샤오핑(등소평)이 「총설계사」가 되어 개혁·개방에 나선지 15년이 경과한 지금 중국은 십인십색의 개방시대,사회주의라는 상표를 붙인 시장경제체제로 탈바꿈해가고 있다. 그러나 모의 권위는 여전하다. 26일 모 탄생 1백주년을 맞아 중국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부문별로 살펴본다.<편집자주>
『일치단결하여 앞으로 나아가자』(단결일치향전서)는 모시대의 대표적인 구호다. 당을 중심으로 단결해 사회주의국가 건설에로 물질적 반대급부도 바라지 않고 너나 없이 온몸을 던지던 이상사회적 공감대를 담고 있다.
『전국민이 돈을 향해 나아간다』(전민향전간)는 등시대를 풍자하면서 모시대의 구호를 변형시킨 형태다. 모시대가 문화대혁명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고 등이 개혁·개방을 시작한지 불과 15년만에 모시대의 가치관·경제체제·당과 인민의 관계·국제관계에 이르기까지 중국사회는 미증유의 변혁을 경험하고 있다.
『모시대의 당간부들은 지금처럼 부패하지 않았다. 소련의 수정주의나 미 제국주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은 다투어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 밖으로는 영·미에 코가 꿰어 끌려다니지 않는가』라고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모 치하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청색이나 회색 제복을 입고 「표」가 있어야 생필품을 살 수 있었던 잿빛시대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모의 통치에는 민주와 집중이 결합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저울은 항상 「집중」쪽으로 기울었다. 반우파투쟁·대약진·인민공사,그리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정치적 홍역이 잇따랐던 것은 이념적 경직성 때문이었다. 최악의 사회주의적 관료체제속에 대약진과 인민공사가 실패로 돌아간 3년동안 약 2천만명이 굶어죽었다.
그래도 당은 선전기관을 동원해 「혁명의 깃발은 아직 우리손에 있다」고 주장하고 국민들은 배를 굶주리면서도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 모시대다. 당의 지도아래 자기집의 밥솥까지 깨부숴 철재생산에 바치고 「큰 쇠밥그릇」을 함께 나누면서 이상사회의 도래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만큼 인민들은 당에 종속되었고 당을 따랐다. 실제 출산에서 거주·교육·직업·사상·의료·생계를 도맡아 관리한 주체는 당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1인당 매장비 30위안이 당에서 지급될 정도였다. 당시 사회가 확대된 가족이었다면 당은 가장역할을,개인은 그속에 매몰된 피동적 지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제는 『공산당이 백성을 돌보지 않으니 백성이 자기 자산을 돌볼 수 밖에 없다』(공산당불관심노백성,노백성자기관심자기)는 말이 유행어로 등장하고 있다. 사태가 1백80도로 변한 것이다.
『등의 개혁·개방은 달리 표현하면 권력의 분산입니다.』
공산당에 집중되었던 권력의 재분배가 다름아닌 경제개혁이며 동시에 정치체제에까지 영향이 파급되고 있다고 한 당간부는 역설했다.
그러나 이같은 권력분배가 법제에 의하지 않고 정치체제와 구조적으로 일당독재가 고스란히 유지된 바탕위에 진행되면서 권력·이권이 결합하는 심각한 부정부패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법제관념 없이 대중운동방식에 매달렸던 모시대의 유산이기도 하다.
등 정권이 모탄생 1백주년을 맞아 모에 대한 추모와 숭배열기를 뜨겁게 달구는 것도 모의 권위를 빌려 개혁·개방으로 흐트러진 당과 사회주의 정권에 대한 신뢰·복종을 회복해보려는 계산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중국 지도층의 정경분리적 개혁작업이 결과적으로 당에 대한 인민의 관계를 희생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이러한 정치적 변화와 혼돈을 모 추모 열기로만 수습할 수는 없을 것이다.<북경=전택원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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