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CSI는 장비보다 명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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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28일 미국 샌디에이고에선 전 세계 과학수사관들이 모여 제92회 국제감식협회(IAI) 총회를 열었다. 국제감식협회는 과학수사 기법과 정보를 공유하고 전문가 인증제도를 운영하는 전문가 단체다. 올해 총회에선 최신 수사 기법들이 논의됐고, 첨단 감식장비들이 선보였다. 지금까지 어렵다고 여겨진 피부에서 지문을 채취하는 방법이 공개됐다. 영화처럼 폐쇄회로 TV에 나온 용의자의 얼굴을 확대하는 장비가 눈길을 끌었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정영세 경감은 "쭉 둘러보니 우리가 가진 장비와 시설.기법도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국립 과학수사연구소는 서래마을 프랑스 영아 살해.유기 사건 수사에서 결정적인 DNA 증거물을 찾아냈다. 프랑스 언론도 감탄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정 경감도 부러워했던 순간이 있었다. 총회 개막식에서 지난 한 해 숨진 과학수사관 회원들을 일일이 거명했던 때였다. 사회자는 그들의 이름과 협회 가입 연도, 소속 지부를 읽어 내려갔다. 어떤 회원은 가입 연도가 1950년대였다. 개막식 참석자들은 묵념을 하며 그들을 추모했다. 과학수사관이란 점을 명예스럽게 생각하고 수십 년간 전문성을 키웠다는 사실에 한국 과학수사관들은 놀란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선 과학수사와 과학수사관들에 대한 인식이 대단하다. 대만계 법의학자 헨리 리(리창위) 박사의 경우 미국에선 석학으로 존경받는다.

우리의 현실과 거리가 먼 모습들이다. 한국에서 과학수사의 전문성이 인정받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얼마 전까지도 과학수사는 현장에서 지문을 뜨는 '단순 잡무'로 평가받았다. 경찰은 근래 미국 과학수사 드라마 'CSI'에나 나올 법한 시설과 장비를 갖추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점점 영악해지는 범죄자를 잡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과학수사관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한참 뒤처진 편이다. 일례로 여러 명의 경찰 과학수사관들이 암 투병 중이다. 이들은 사건현장에서 지문감식용 미세 분말에 든 유독 물질이 암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지난해서야 경찰이 대책을 내놓았다. 미 연방수사국(FBI) 과학수사관 출신인 다이애나 카스트로 IAI 의장은 "범인을 판명하는 것은 장비가 아니라 수사관"이라고 말했다.

이철재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