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산다>6.전북 고창서 화훼농장 운영 진영호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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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전북고창에서 솜바지를 입은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인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여 달렸을 때 한겨울에도 싱싱한 생기를 뿜어내는 파란 보리밭이 나타났다.잔잔한 물결인양 조용하게 일렁이는 「녹색융단」의 긴 밭이랑을 돌았을 때 「신출내기 원예업 자」 陳泳虎씨(45.전북고창군공음면선동리 학원농장)의 비닐하우스가 저만치진흙밭 속에서 다가왔다.
진흙으로 범벅이 된 신발과 검정색 야전복 차림의 陳씨는 마치생전 도시물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인양 그곳 토박이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1년전만 해도 주식회사 錦湖의 「잘 나가는」 임원이었다.
서울에서 출생,40평생을 그곳에서 살면서 스스로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陳씨는 수출신장을 위해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국제감각도 겸비한 대기업의 일꾼이었다.
그가 월급쟁이의 기쁨이랄 수 있는 이사직(그룹회장 부속실)에오른 후 1년여만에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은 날이 갈수록 격무에 시달릴 뿐 상대적으로 쌓이는 보람이 적었기 때문이라는 것. 거의 매일 새벽에 나가 밤늦게 귀가하는 생활을 계속해야 했던 그는 『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진하게 하게 됐다고했다. 마침 회사가 그에게 떨군 업무가 「농촌의 변화에 맞는 사업 물색」이었다.이 일을 위해 3개월간 자유롭게 농촌을 돌아다닌 그는 오랜만에 즐긴 자연에서의 자유를 위해 다시는 묶이지않으리라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했다.서울대농대 농경제 학과 출신이기도 한 그가 농업에 종사하는 대학동창들과 농대 교수들을 만나면서 얻은 결론은 향후 전망이 좋고 고부가가치 상품인 꽃을재배해 보자는 것이었다.
서울에 미련이 많은 아내(羅蘭嬉.42)를 설득,결국 화훼업자가 되기로 한 그는 지난해 5월 20년간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냈고 현재의 위치로 자리를 옮겨앉았다.
전문가인 동창들을 찾아다니고 책을 통해 독학하면서 원예에 대한 지식을 익혀나간 그는 8월중 2천평에 달하는 비닐하우스를 건립하고 그 안에 8만본의 카네이션과 백합을 심어나갔다.
高3짜리 딸의 입학시험이 끝난 후 아내와 합류하기로 하고 이곳에 내려와 가건물을 지어 1년여째 「홀아비 살림」을 하고 있는 셈.先塋이 가까운 부모의 땅 한부분을 얻었고 퇴직금과 그동안 모아온 적립금등을 합쳐 2억원을 투입했다.
3명의 일꾼을 두고 있는 그가 현재 하는 일은 꽃을 돌보는 일 이외에도 채화 후 이를 단으로 묶어 서울도매시장에 출하할 수 있도록 버스터미널까지 수송하는 일.
「풋내기」화훼업자이면서 프로임을 자부하는 그는 지난 어버이날탐스럽고 싱싱한 카네이션 30만송이를 적기에 출하,재미를 봤다고 자랑했다.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도시탈출을 꿈꾼 적이 있을 겁니다.그러나 자신이 속해 있는 일터에서 자신이 없어 영농을 택한다면 이 역시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이 일에는 보이지 않는 더 큰어려움이 있으니까,누구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성공적으로 끝낸 후 결정을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자신을 아마추어로보지 않는다.왜냐하면 농대를 나온 후 1년간 농장을 경영한 경험이 있고 수출회사에 있으면서도 이 분야에의 관심을 멈추지 않고 공부를 계속했기 때문.
장차 도시인들에게 쉼터와 학습용 텃밭을 제공할 「관광 농장주」를 꿈꾸고 있다는 그는 해가 일찍 떨어지는 한겨울의 긴밤을 정말 오랜만에 행복에 겨워 보낸다고 했다.
저녁에는 읍내 학원에 나가 그동안 못했던 컴퓨터 공부도 하고걸식이나 들린 듯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모른다고 신나했다.
『나는 선천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진 것같다』고 말하는 그는 한동안 동네어른들이 아버지(陳懿鍾 前국무총리)의 지역구를 이어받아 정치활동을 해볼 것도 권유했으나 별 관심이 없어 망설일 이유도 없더라고 했다.그는 이웃농민들과 함께 쌀시장개방저지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나가봐야겠다고 했다.
〈高惠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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