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화와 척화(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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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연산군과 조선조의 대표적 폭군으로 꼽히는 15대 임금 광해군이 외교에 있어서는 상당한 솜씨를 보였다는 일부 역사학자들의 시각이 있다. 1616년 성립한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했을 때 명나라 요청에 따라 강홍립이 통솔하는 1만명의 군사를 파견하면서도 이들로 하여금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후금에 투항하도록 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즉 광해군은 멀지 않은 장래에 후금의 세력이 크게 성장할 것을 미리 내다보고 그와 충돌하지 않음으로써 국토를 보전하려 꾀했으며,이같은 외교정책은 성공을 거둬 그의 정권하에서는 후금과의 무력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는 시각이다.
명분보다 실리를 앞세운 광해군의 이같은 외교정책은 「역사상 한반도정권의 외교정책이 실리보다는 명분론을 근거로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고,이 때문에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국가적·민족적 비극을 초래하는 일이 허다했다」는 우리 역사의 일반적 평가와도 맥이 닿아있다.
외교문제가 생길 때마다 팽팽하게 맞서곤 했던 조선조에서의 주화론과 척화론은 본래 당쟁의 또다른 소산이었다. 그래서 마음속은 주화에 기울고 있으면서도 척화쪽도 행동을 같이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이럴 경우의 명분과 실리는 그 개념부터 모호해지게 되어 명분도 실리도 모두 잃는 사태에까지 이르기도 하다.
병자호란때의 주화파나 척화파를 모두 애국의 관점에서 받아들이는 견해도 있으나 엄밀하게 따지면 삼전도의 항복이라는 치욕적인 결과만 낳았을 뿐이다.
이솝 우화 가운데 나귀에 관한 것이 있다. 한 노인이 아들과 함께 나귀를 몰고 시골길을 걷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말하는대로 처음에는 아들을 태웠다가,다시 자신이 탔다가,마지막에는 둘이 함께 탔는데 「나귀가 가엾지 않느냐」는 소리를 듣고 이번에는 나귀를 메고 가다가 냇물에 빠드려 죽게 한다는 이야기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다간 한 사람의 마음에도 들게 하지 못한다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
쌀시장 개방을 하든 안하든 어차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는 노릇이지만 찬성과 반대를 주화와 척화의 개념으로 파악하는데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어느쪽이 명분이고 어느 쪽이 실리인지는 더 두고봐야 하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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