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위암과 싸우는 전 농구선수 박재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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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겨울 바람에 코끝이 매운 지난 11일 오후 9시 서울 상계동 온곡초등학교. 어둠이 내린 운동장에서 털모자를 덮어 쓴 거구의 사내가 힘겹게 뛰고 있다. 1m89㎝의 큰 키에 엉거주춤한 자세지만 30분을 돌아 열바퀴를 채운다. 1993년 실업농구팀 현대전자에 입단한 뒤 2001년까지 프로농구 현대-골드뱅크-기아 등에서 특급수비수로 활약했던 박재현(34)씨다.

한때는 외국인 선수 킬러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지만 2001년 5월 은퇴, 평범한 직장 생활을 거쳐 수원여고 농구팀 감독으로 코트에 복귀한 것이 지난해 초. 그러나 지난해 5월 배가 아파 찾은 병원에서 그는 위암말기 판정을 받았다. 암세포가 복막까지 전이돼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이었다. 담당 의사는 6개월 정도 생존할 것이라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8개월이 지났다. 6개월 시한부를 2개월이나 넘긴 朴씨의 체중은 판정 초기 74㎏에서 최근 83㎏까지 다시 올라왔다.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암세포 덩어리가 돼버린 위 속에 꼬박꼬박 밥을 채워넣었단다.

항암 치료로 모두 빠졌던 머리카락도 밤송이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아내와 두 자녀가 교회에 가고 없는 일요일 저녁의 빈 아파트를 홀로 지키고 있는 朴씨의 모습이 의연했다.

"살아야죠. 머리카락도 이렇게 다시 나고 있지 않습니까. 왠지 저에게도 기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투병이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26평 아파트에서 부인 박수완(33)씨.딸 현민(8).아들 현준(4)군과 살고 있는 朴씨는 현재 소득이 전혀 없다. 매달 들어가는 항암치료비 1백50만원과 생활비는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에서 빌려 메꿔가고 있다. 여섯차례나 항암치료를 받아 이제는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게 됐다.

이런 朴씨에게 최근 작은 희망의 빛이 보이고 있다. 태릉선수촌에서 기독교 사역을 하는 윤덕신(53.여) 전도사가 소위 '농구 낙제생'들로 구성된 실업팀을 만들어 朴씨에게 감독 자리를 맡길 뜻을 전해왔다.

줄곧 朴씨를 도와온 골드뱅크 시절의 후배 장창곤씨가 주선한 일이었다. 물론 아직은 막연한 계획이다. 선수들이 적어도 열두명은 돼야 하고, 후원사도 찾아야 한다. "말기환자가 어떻게 감독직을 맡느냐"고 손사래를 쳤지만 朴씨는 건강을 되찾아 코트에서 땀흘리는 자신을 그리고 있다.

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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