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미학」과 보복심리/정규웅(중앙칼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문학적 평가는 크게 미흡하지만 우리 현대문학사에 있어서 작고한 소설가 김내성만큼 많이 읽힌 사람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는 대중성이 짙은 작가였지만 통속작가는 분명 아니었다. 지금 중견 내지 중진으로 활약하고 있는 40대 이상의 문인들이 한결같이 청소년시절 그의 작품들을 읽고 문학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음을 실토하는 것만으로도 쉽사리 입증된다.
○불행한 다수들은 갈채
우리나라 탐정소설의 개척자로 꼽혀오고 있기도 하거니와,그는 수많은 순수소설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의 성가를 높여준 것은 일련의 탐정소설과 추리소설들이었다.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그 자신이 술회한바 「행복한 소수를 위한 문학이 아닌 불행한 다수를 위한 문학」이었고,그것은 『마인』 『검은별』 『백가면』 등 수많은 탐정소설을 통해 그대로 드러났다.
그의 탐정소설을 일컬어 「복수의 미학」으로 부르는 것도 그가 추구했던 「대중적 이상의 세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악을 응징하는 행위는 설혹 거기에 어떤 정당성이 부여된다 하더라도 행복한 소수를 신나게 하고 통쾌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적 의미의 권선징악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악과 불의가 철퇴를 맞는데 공감하고 갈채를 보내는 계층은 여전히 불행한 다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선악의 대비개념이 아무리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더라도 모든 복수극의 미학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며,불행한 다수에게 공감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이 분명치 않거나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복수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남이 자기에게 해를 입혔을 때 자신도 그에게 해를 주는 행동」을 복수의 일반적 개념이라 한다면 대상이 분명치 않은 복수는 우선 그 개념에서 크게 어긋나기 때문이다.
○보복과 복수 구별해야
재작년엔가 거의 동시에 일어났던 두개의 사건이 좋은 예에 속한다. 하나는 여의도의 자동차 폭주 살인사건이며,다른 하나는 대구의 나이트클럽 방화사건이다. 18명이 죽고 20여명이 크게 다친 이들 두사건의 범인은 똑같은 20대 소외계층이었다. 범행동기 역시 똑같이 이 사회에서 대한 불신과 불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없는 삶」은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그 모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고,그래서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것으로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보상받자는 어처구니없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 사건들에 못지 않게 끔찍한 느낌을 주는 것이 최근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에이즈 복수극」이다. 얼마전 한 여성지가 가상의 내용을 마치 실화인양 게재해 물의를 빚은 일도 있지만 실제로 에이즈환자가 헌혈이나 접촉 등 의도적 방법으로 병균으로 옮기는 일이 잦아 에이즈 확산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보도가 그것이다.
보균자의 피를 수혈해 뜻하지 않게 에이즈환자가 된 사람이 품게 되는 분하고 억울한 심회야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그렇게 해서 되풀이되는 「복수의 악순환」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 것인가는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그들에 의한 피해자는 똑같은 복수심으로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 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거나 대상이 불분명한 복수조차도 김내성식 「복수의 미학」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엄밀히 말한다면 재작년의 두사건이나 「에이즈 복수극」의 경우는 단순히 사회에 대한 보복심리일뿐 복수개념에 포함시킬 수 없다. 이상하게도 우리말 사전들은 한결같이 복수와 보복을 같은 개념으로 풀이하고 있지만 그 두개의 단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우선 「미학」이라는 관점에서 그렇고,화해와 관용의 정신이 개재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에서 그렇다.
정치권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지난봄 새정부가 출범하고 개혁과 사정의 태풍이 휘몰아치면서 한때 힘깨나 쓰던 사람들이 줄줄이 갇히는 신세가 되자 많은 국민들이 당연한 응징으로 받아들였다. 적어도 5,6공 치하에서는 거의 모든 국민들이 피해자라고 볼 수 있으며,그런 점에서 5,6공에 대한 「불행한 다수」를 위해 새정부가 대신 복수했다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화해와 사랑을 보일 때
만약 그것을 복수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면 「복수의 악순환」은 되풀이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몇몇 당사자들의 항변은 물론 일부 언론들이 비추는대로 보복심리를 우회한 표현으로서의 「정치적 의미」는 당치 않다. 설혹 보복심리가 개재해 있다 하더라도 이쯤에 와서는 화해와 사랑의 정신을 보일 때가 되지 않았는가 기대를 걸게 되는 것도 그 까닭이다.<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