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출퇴근제 달라진 풍속도-퇴근길 딱한잔 사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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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치켜세운 옷깃으로 쌀쌀한 새벽공기를 가르며 회사를 향해 바쁜발걸음을 옮기는 직원들.아침식사를 거른 일부는 샌드위치를 파는거리의 가판대나 분식집으로 몰려든다.
길목마다에는『○○학원 마침내 三星班개설! 오후 5시 개강』이라고 쓰인 외국어강좌 안내 팸플릿을 나눠주는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출근시간인 7시 정각을 넘기면서 떠들썩하던 거리의 사람들과 차량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삼성맨」들로 새벽잠을 설친 거리는 본격적인 러시아워가 시작되는 7시30분쯤까지 다시 잠시동안눈을 붙인다.
달라진 것은 거리의 표정뿐만이 아니다.
『시간절약이 엄청나죠.출퇴근때 평균 2시간 걸리던 것이 1시간으로 줄었고 복잡한 버스에 시달리다 회사에 도착하면 맥부터 탁 풀리던 것이 없어졌습니다.대신 차분한 마음으로 업무를 시작할수 있죠.퇴근후 영어회화나 취미생활을 할수 있게된 것은 물론입니다.』(三星전자 회계팀 徐成煥대리) 『근무시간이 2~3시간줄어든 셈이다보니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자연히 서서하는 회의가 생겨나고 웬만한 안건도 구두나 메모로 보고하게 됩니다.업무강도는 다소 높아졌지만 일할때 열심히 일하고 끝나면 확실히 쉬게된셈이죠.』(제일제당 李昌鎬의 약마키팅과장) 三星그룹의 전면실시를 계기로 본격화된 조기출퇴근제는 현재 삼성계열 협력회사 1백50개사와 남양알로에.귀뚜라미보일러.경동보일러.한일시멘트등 중견회사에도 확산됐고 지난달부터는 韓一그룹도 이를 도입했다.
또 효성그룹.포항제철은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던 퇴근시간을 오후5시30분과 오후 5시까지로 각각 못박은「정시퇴근제」를 실시했으며 최근에는 금융기관인 대한교육보험. 부국증권까지 8시 출근,5시퇴근으로 1시간씩 출퇴근시간을 앞당겼다.
조기 출퇴근을 실시하는 회사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은 飮酒문화의 변화다.
「다른 직장에 있는 친구들과 시간대가 전혀 맞지 않는 탓에」또는「밝은 대낮」에 퇴근하다보니 과거 습관적으로 해오던 퇴근길동료들과의「딱 한잔」도 이제는「낮술」을 감수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해졌다.
부서 전체회식의 경우 종전에는 회사주변 식당에서 1차를 하고소주.맥주로 2차를 한뒤 노래방이나 강남카페를 거쳐 자정이 넘어 귀가하는 것이 정석이었으나 이제는 극장.당구장.볼링장→고급저녁식사→생맥주→10시귀가로 패턴이 달라졌다.
또 천편일률적으로 짙은색 양복 일색이었던 퇴근길이 옷차림도 운동을 위해 미리 평상복등으로 갈아입고 나서는 직원들이 생겨나면서 한층 밝아졌는데,특히 평상복근무가 허용되는 토요일 퇴근무렵의 회사정문은 청바지등의 차림을 한 직원들로 마 치「대학교 정문」을 방불케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추세로 인해 회사주변 술집.음식점은 판매격감에울상이다.三星의 넥타이부대가 손님의 주류를 이루던 북창동 술집골목 일대의 업소들은 매출이 30%이상씩 떨어지자 최근에는 술값.팁값을 다소 내린뒤 다른 회사나 남대문시장 상인들로「주력손님」을 바꿔나가고 있다.
음식점의 경우에도 저녁손님이 크게 줄어들었는데 다행히 三星직원들의 점심시간이 9월 부터 11시30분으로 앞당겨지고부터는 2회전이 가능해져 손해가 다소 줄어들었다.
서소문에 위치한 D社의 한직원은『이젠 12시 점심시간에 아무리 빨리 나가도 좋은 음식점엔 三星직원들때문에 자리가 없어 하는수 없이 직원들끼리 이야기하다 12시10분넘어 식당을 찾는다』고 부러움 섞인 불평을 했다.출근시간이 앞당겨지 면서 아침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나오는 직원들이 많은 것이 다소 문제다.이젠 일찍 일어나는데 익숙해져 시행 초기처럼 바빠서 밥먹을 시간이 없는 직원들은 줄어들었지만 상당수가「피곤한 아내에게 새벽밥을 짓게하기가 뭐해서」등의 이유로 회사 주변에서 간단히 때우든가 아예 거르고 있다.
실제로 한일그룹 소속 국제상사의 경우 구내식당 이용객수에 변함이 없음에도 불구,「결식직원」의 영향으로 점심식사때 쌀소비량이 예전보다 30%가 늘어나기도 했다.
조기출퇴근제의 영향은 지방으로까지 확산,특히 三星계열사 사업장이 있는 지역에서는 영어.일어등 각종 외국어학원과 수영장.테니스장.자동차운전교습소등이 때아닌「특수」를 누리고 있다.
생산직사원이 주종을 이루는 三星기흥공장의 경우 교대근무제라 조기출퇴근과는 큰 상관이 없지만 그룹 전반적인 여가활용붐에 힘입어 서울과 마찬가지로 인근 학원들이 30~40%의 이용료할인을 내세우며 열띤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다.
회사측 또한 조기출퇴근제로 인해 특근비나 시간외수당이 평소의3분의2수준 이하로 떨어지는「뜻밖의 수확」을 올리고 있는데 대부분의 회사들은 이 이익으로 직원들이 퇴근이후 학원에 다닐 경우 수강료의 50%까지를 지원해주고 있다.
〈李 孝浚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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