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일자리 창출 안된 까닭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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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국내 굴지의 대기업 이사였던 A씨는 지지난해 말 퇴직했다. 10년 가까이 해외지사에 근무해 영어가 유창하고 골프 핸디가 싱글인 그는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복덕방을 열거나 아니면 골프연습장을 차릴 생각을 했다. 그러나 웬만한 곳엔 다 들어차 있는 데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후 재취업 기관들을 찾아다니며 이력서를 냈으나 여지껏 아무런 연락조차 없고, 퇴직금은 점점 떨어져 가는 중이다.

며칠 전 한 전자업체가 '15명' 채용 발표를 했다. 1970~80년대만 해도 현대.삼성.LG.대우 등 대기업들은 '그룹 공채'라 해서 매년 수천명씩 뽑았다. 이젠 1천명도, 1백명도 아닌 채용 자체가 자랑거리가 되는 게 현실이다. 기업들이 많이 뽑지 않으니 채용 공고만 하면 지원자가 구름처럼 몰려든다. 경쟁률은 1백대 1을 넘기 일쑤다.

이처럼 청년.장년 할 것 없이 실업의 공포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나온 노무현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이 들 정도다. 그런데 "올해 '일자리 만들기'를 정책 최우선에 두겠다"는 선언은 있었으나 그간의 상황에 대한 설명 내지는 반성이 없어 아쉬웠다.

지난해 국내 일자리는 3만개나 줄었다. 지난해 말 현재 20대 청년실업자는 37만명. 아예 취업을 포기하는 바람에 통계에서 빠진 사람들을 합치면 실제 실업은 통계치의 두배는 될 것이란 추산도 나온다. 그렇다고 이들이 기성세대보다 영어를 못하고, 컴퓨터를 못하나. 그 책임은 실업의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아닌, 일터를 제대로 만들어주지 못한 어른들에게 있다. 기업은 고용이 최선의 사회공헌임을 인식해야 하고, 근로자는 '제 몫 찾기'에만 급급해선 안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국정을 책임지는 정부의 직무 유기가 크다. 이 점에서 "지난해 일자리를 못 늘려 정말 죄송하다"는 말부터 있어야 했다고 본다.

구체적인 플랜도 아직은 확실치 않다. 대통령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경제지도자 회의'를 열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모호하다. 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 자칫 토론으로 또 날만 새는 것 아닌지 하는 걱정이 앞선다.

일자리 만들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방법은 사실 명료하다. 고용의 주체는 기업이다. 따라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기업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정보화시대로 넘어가면서 이제 60~70년대와 같은 10%대 고도성장은 어렵다. 산업화 시대 같은 대량 고용도 어려워진 것이다. 반면 투자의 국경은 없어졌다. 따라서 관건은 어떻게 하면 외국 기업을 많이 끌어들이느냐, 또 국내 기업을 붙잡아 두느냐로 압축된다.

이 때문에 각국은 치열한 기업유치 전쟁을 벌이고 있다. 공장을 짓겠다면 땅도 공짜로 준다. 모든 선진국의 경제정책 제1조가 투자유치요, 고용창출이다. 지난해 우리는 국내 기업의 해외투자가 외국기업의 국내투자보다 많아지는 경험을 했다. 이게 도식으로 굳어져선 일자리 창출은 요원하다.

대통령은 연두회견 때 모두발언의 4분의 3을 경제에 할애했다. 그만큼 생각이 경제에 가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젠 주로 만나는 사람도 경제인이었으면 한다. 재계 대표들뿐 아니라 중소기업인.시장 상인들도 만나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외국 기업인들도 많이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제는 시간이요, 행동이다. 경제계 인사들은 "기업이 다 빠져나간 뒤엔 백약이 무효"라고 입을 모은다.

민병관 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