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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을살리자>7.배추-고소한 맛 의성産만 명맥유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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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내에서 주로 재배되는 배추는 대개 30여종.
이중 김장 김치용은 여섯가지 정도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계절별로 여러가지 배추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모두 토종이 아닌 개량종들.
토종으로는 경북의성 지방에서만 재배되는 의성배추와 원형에서는다소 떨어지지만 명맥만은 유지되고 있는 서울배추가 있으나 쉽게구경할 수 없을 정도다.
『한겨울 밤 온 식구가 화롯가에 둘러 앉아 언 배추 꼬랭이를둥구미째 갖다 놓고 까 먹던,고소하면서도 알싸한 그 맛이란…』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40대 이상이면 찬바람이 불때 쯤해서 떠올리는 배추 꼬랭이에 대한 아련한 향수다.
모든게 궁핍했던 시절,무처럼 간식용으로 즐겨 깎아 먹던 꼬랭이는 술속을 시원히 풀어 주는 훌륭한 국거리이기도 했다.
이처럼 서민들에게 꼬랭이를「선물」했던 배추는 통칭 조선배추.
10세기께 중국 양자강 주변에서 야생 순무와 광동지역 자생인「팍초이」의 자연교배로 생겨난 것으로 알려진 배추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7백년이 훨씬 넘었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
1236년 국내산 약재의 자급자족을 위해 편찬된 최초의 의학서 『鄕藥救急方』에 처음 등장하는「숭」이란 이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名醫 李時珍이 그의 저서 『本草綱目』(의학서)에서 배추의 원산지로 趙.楊州와 함께 한반도와 가까운 燕을 꼽고 있는 것으로 미뤄 원시상태의 배추는 이보다 훨씬 앞서 들어왔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배추가 중국으로부터 들어 왔다는 사실은「배추」라는 우리말이 白菜의 중국식 발음인「이이」에서 →배초→배추로 변한데서도 알 수 있다.
려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중국으로부터 배추종자를 들여오는 등 재배가 확산돼 갔으나 재배 및 채종기술 부족으로 김치의 주원료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부터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쉽게 무르고 가공.저장술이 발달되지않아 주로 날로 무치거나 삶아 먹는게 고작이었다.
김치로 담가진 최초의 기록은 1710년 洪萬選이 펴낸山林經濟의「숭菜」로 무.순무등과 섞어 만든 막김치 형태였다.
이 때부터 배추가 본격 재배되기 시작해 1850년대 씌어진 農家月令歌(10月令)에는『무.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는 구절이 나올 정도로 채소중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토착화된 대표적 토종배추는「개성배추」와「서울배추」.
연하면서도 고소한 특유의 맛과 빨리 길러 먹을 수 있는 早熟性등으로 60년대까지만 해도 웬만한 농가의 남새밭에 심어지곤 했으나 이 역시 생산성에서 뛰어난 신품종 보급이후 멸종되거나 원형을 잃어버렸다.
일본인 농업학자 思田鐵彌는 1906년 펴낸「한국에 있어서의 과수채소재배보고서」에서『개성지방에서 재배되고 있는 開城白菜는 일본이나 중국의 어느 품종보다 품질이 우수하다』며『앞으로 일본도 이를 수입해 재배해야 할 것』이라고 개성배추를 극찬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개성배추 씨앗은 한때 국내 전역은 물론일본에서도 인기가 높아 수출까지 됐었다.
경성배추로 불리기도 했던 서울배추 역시 고소하면서도 특히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으며,김치를 담가 오래 두어도 쉽게 무르지 않는등 보관성이 탁월한 특성을 지녔었다.
특히 조선말엽부터 동대문 씨앗장수들을 중심으로 우수한 종자를골라 대량재배를 시작,5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 김장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했으나 60년대 이후 신품종 보급으로 사라지기 시작한이후 80년대 부터는 재배농가조차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최근 서울배추의 맛을 못잊어 종자를 찾는 사람들이 늘자 10여개 종묘회사가 보관용 씨앗을 다시 파종해 팔고는 있으나 수확성 위주로 변형된 종자인 탓에 본래의 맛과 형태를 잃었다는 게 한결같은 얘기다.
연원은 알 수 없으나 경북의성지방에서 수백년 동안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의성배추는 옛 문헌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종자로 최근 토종배추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가운데 학계와 종묘상들의 관심도 높아 지고 있다.
종묘상들은 재배되는 마을 이름을 따 편리하게 「한골채」라고 부르고 있으나 현지에서는 「우리배추」「뿌리배추」등으로 부르고 있으며 거름이나 농약을 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인해 아무데서나 잘 자란다.
풋내가 나지 않고 쓴 맛이 전혀 없는데다 씹을수록 고소하고 단 맛이 돌아 예부터 주로 쌈싸 먹는데 애용됐고,특히 꼬랭이는그냥 먹기도 하지만 달여 민간요법의 홍역기침 치료제로 쓰일 정도의 약효도 지녔다.
***토 종배추의 일종으로 현재 강화지방에서만 재배되고 있는순무도 있으나 주로 뿌리를 이용하는 탓에 무로 잘못 알려져 있다. 염색체 수가 배추와 같은 10개(무는 9개)로 생물학적으로 배추種이다.배추의 元祖로 알려진 순무는 조선중엽 까지만 해도 김치재료로 전국적으로 재배됐으나 지금은 강화도를 제외하고는거의 찾아 볼 수 없어 요즘은 아예 「강화순무」로 불리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재배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순무는 옛 農書에 蔓菁子.蕪菁.菁등으로 기록돼 있으며,고려시대 문필가 李奎報는 그의 문필집 東國李相國集중「家圃六詠」(남새밭에 심는 여섯가지 채소에 관해 적은 책)에서『김치를 담글 때 이용하며 서리가 내린뒤의 그 맛은 배처럼 달다』고 적고 있다.「강화도령」 哲宗이 입궁한 뒤 순무 김치맛을 못잊어 하자 소주방에서 순무김치를 만들어 진어하기 시작해 그후 궁중음식으로 자리잡게 됐다는 사실은잘 알려진 얘기.
자색 또는 흰색 뿌리를 갖고 있는 순무는 원추형과 타원형 두가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원추형만 남아있으며,뿌리 지름이 무처럼10~20㎝나 될 정도로 크고 웬만해서는 바람이 들지 않는 특성을 지녔다.
특히 최근에는 배추 뿌리에 혹이 생기면서 성장이 저해되는 배추 근류병(根瘤病)의 내병성 유전자가 바로 이 순무에 있는 사실이 확인돼 일본과 유럽은 물론 국내에서도 배추와 순무를 교배시켜 새로운 품종을 만들기 위한 유전공학적 품종개 량 작업이 한창이다.
〈李晩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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