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화 자존심 미국에 '접수'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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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왼쪽에서 둘째)이 12일 경호원들과 함께 뉴햄프셔 위니페소키 호수변 도로에서 조깅을 하고 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11일 부시 미 대통령과 캠프 데이비드에서 정상회담을 했다.[뉴햄프셔 AP=연합뉴스]

니콜라 사르코지(52) 프랑스 대통령이 미국인처럼 조깅을 즐기는 데다 역대 프랑스 정상 중 처음으로 미국으로 휴가를 갔다. 이를 두고 논란이 분분한 프랑스에서 미국 드라마의 공세까지 거세 자국 문화 보호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지난달 민영방송 TF1이 대대적인 홍보 끝에 미국의 시리즈물 '히어로'를 방영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 방송사는 '히어로' 시리즈를 들여오기 위해 거액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히어로'는 최근까지 20% 중반대의 시청률에 머물러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실망한 방송사가 이유를 알아봤더니 뜻밖에도 프랑스어로 더빙한 것이 이유로 꼽혔다. 프랑스에선 자국어 보호를 위한 '투봉법'에 따라 지상파 방송에서 외국 드라마를 방영할 때는 반드시 더빙을 하고 원어 자막을 넣는다. 이에 따라 영어로 된 드라마를 선호하는 젊은 시청자들이 TV 시청을 기피하고 대신 인터넷으로 내려받아 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TF1은 고심 끝에 일부 미국산 드라마와 영화를 원어로 방송하고 프랑스어 자막을 넣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이런 계획이 새나가자 찬반 논란이 들끓기 시작했다. TV 토론회까지 열렸다. 학자들은 "미국 문화의 범람 속에서 프랑스 문화와 언어를 보호하기 위해 투봉법을 지켜야 하며, 외국 드라마도 프랑스어로 방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젊은 시청자들은 "스웨덴 등은 거의 모든 외화를 원어로 방송하는데 그렇다고 그 나라 문화가 없어졌느냐"고 맞섰다. 난감한 TF1은 일단 지상파 방송에서 영어로 드라마를 내보내려던 계획을 유보했다.

최근 몇 년간 프랑스에선 한국에도 잘 알려진 '로스트' '엑스퍼트' '프리즌 브레이크' 등 미국 드라마 시리즈물이 인기몰이를 했다. 이들 시리즈는 시청률 조사에서 2위인 프랑스 드라마와 두 배 이상 차이가 나는 시청률로 1위를 기록했다. 그래서 방송사들은 비싼 돈을 써가며 인기 시리즈 잡기 경쟁을 벌여왔다. 프랑스 TV에선 현재 낮 시간대에 '콜롬보' '초원의 집'을 비롯해 수십 년 전 방영됐던 미국 시리즈를 재탕해도 인기를 끄는 상황이다.

프랑스 방송 프로그램에 영어 이름을 붙이는 추세에 대해서도 찬반 양론이 거세다. 프랑스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스타 아카데미' '시크릿 스토리' 등에 대해 "꼭 영어 이름을 달아야 인기를 끌 수 있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그러나 젊은 시청자들은 "영어 이름이 붙은 프로그램이 훨씬 더 멋있게 느껴진다"며 두둔하고 있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투봉법=1994년 프랑스 문화장관이던 자크 투봉이 프랑스어 보호를 위해 만든 법. 외국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 케이블TV에선 일부 원어로 내보낼 수 있으나 지상파에선 모두 더빙 방영하도록 했다. 프랑스에선 영화관에서 영화를 상영할 때도 프랑스어 더빙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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