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뜨고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제1부 불타는 바다 어머니,어머니(5)일본제국주의의 강압적인정책과 함께 시작된 조선 수탈이 토지와 물자를 거쳐 마지막에 가 닿은 곳,그 곳은 사람이었다.그들의 마지막 발악은 정상적인노동력을 가진 조선의 청장년에 그치지 않았다.그렇게 해서 10대의 소년 소녀까지 탄광으로 공장으로 끌어가기 시작한 그 단말마적인 수단이 징용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진 강제연행이었다.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일본이 조선에서 행한 식민지 정책의 변천을 더듬어 보아야 한다.
조선의 노동력을 형식상 어떠한 방법으로,그리고 그 규모까지 어떠한 형태로 일본에 끌어넣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식민지 지배전 기간에 걸쳐서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이 식민지 지배 방법의 변천은 일본과 조선 두 나라 사이의 관계에서만 결정되었던 것은 아니었다.다만 밖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크게 달라진 시기를 중심으로 나누어 보면 식민지 정책은 네가지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그렇게 해서 가 닿은 곳이 1945년 일본이 맞이한 패전이었다.
제1기가 식민지 통치가 시작되어서부터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까지이다.그 다음 2기가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인 1931년까지라면 제3기는 이때부터 1938년까지로 볼 수있다.여기에 이어지는 것이 조선인을 강제연행하여 노동력을 확보하기 시작하는 시기로서,일본의 패전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조선의 인력을 어떻게 일본의 기업에 쓸어넣을 것이냐 하는 문제가 정책적으로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1918년,일본으로는 대정 7년이었다.조선총독부는 이 해 조선총독부령으로「노동자모집 수취규칙」이라는 것을 공포했다.
이미 이때부터 조선인 노동자를 모집과 응모라는 형식을 갖추고있기는 하지만,이 관계는 단순히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와 그들을써서 생산활동을 하는 기업 사이의 관계는 아니었다.노동자를 모집하여 송출 당시 돌을 깨는 석공의 하루 임금 이 2엔40전이었다. 인력거꾼의 하루 벌이가 2엔50전이었던 때였다.이때 탄광으로 일을 하러 간 사람들,광부의 하루 임금이 평균 1엔30전이었으므로,먼저 탄광으로 간 누군가가 조선에 있는 사람을 소개할 경우 닷새 정도의 노임에 해당하는 소개료를 받았던 것이다.이것이 초기에 있었던 노동자 모집 형태였다.
여기에서 꼭 필요했던 서류에「무해증명」이라는 이름의 허가장이있었다.일본에 건너가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