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북한>36.측근세력 군 2.유일체제 문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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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北韓軍에는 白鶴林.李乙雪.朱道日외에도 金正日의 핵심측근들이 국방위원장이자 최고사령관인 그를 에워싸고 있다.빨찌산 출신인 李斗益.趙明錄을 비롯,빨찌산2세로 萬景臺혁명학원을 나온 金斗南.金江煥.李奉遠도 핵심측근에 속한다.
黨중앙군사위원인 인민군 차수 李斗益은 의병에 참가했다가 북간도로 이주한 집안이어서 延吉에서 태어나 성장했다.1930년대 중반이래 金日成 빨찌산부대에서 호위병.전령병 노릇을 한 그는 그뒤 蘇聯극동군 88특별정찰여단에 소속돼 北滿.東 滿과 압록강.두만강 국경지대,함경도를 넘나들며 日本軍동태를 파악하는 정찰활동을 수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해방후 소련군과 함께 청진으로 입북한 그는 金日成호위부대 소대장을 지냈으며 6.25때는 대대장이었다.54년에 레닌그라드 종합군사대학으로 유학,58년에 귀국한뒤 9사단 3연대장.군사부사단장을 거쳐 62년에 9사단장으로 승진,군부핵심 인사로 자리잡게 된다.
그는 민족보위성(인민무력부 전신)작전국장(63년),7군단장(65년),제2집단군사령관(73년),제2군단장(76년),제4군단장(80년)등 굵직굵직한 군경력을 거쳤으며 80년에는 노동당 최고군사지도기관인「중앙군사위원회」위원으로 선출돼 명실상부한 군수뇌가 됐다.그뒤 평양방어사령관.金日成호위사령관.인민무력부 부부장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軍 보직없이 黨군사위에서 金正日을 보좌하고 있다.
李斗益은 蘇聯유학에서 현대군사과학을 익힌 전형적인 직업군인으로 월남전때 월맹측 게릴라부대 고문으로 1년간(67~68년)파견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일찍부터 金日成과 정치운명을 같이해온 그는 69년의 金昌奉.
許鳳學사건때 軍강경파를 제거하는데 앞장섰음은 물론 76년의 金東奎사건때 軍내의 反金正日세력을 제거하는데 앞장서 후계체제 기반을 강화한 인물이다.
李斗益과 마찬가지로 延吉출신인 공군사령관 趙明錄은 1938년께부터 金日成 호위병.전령병으로 활동한 빨찌산출신.해방후 金正淑.金正日과 雄基항으로 入北한 그는 吳克烈에 이어 77년이래 공군사령관을 맡아온「長壽」사령관이다.
두차례 蘇聯유학기회를 가진 그는 육.공군 지휘능력을 겸비한 것으로 알려져있고 60년대 중후반의 호위국 부국장.부사령관시절에는 金正日이 호위국을 직접 장악할수 있도록 뒤에서 돌본 인연이 있어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고 한다.
黨중앙군사위원인 金斗南대장은 평북 碧潼郡 화전민태생으로 朔州화학공장에서 노동하다가 해방을 맞이해 빨찌산출신으로 전사한 아버지덕에 萬景臺학원에 다닐수 있었다.6.25때 군관학교를 마치고 소대장으로 참전한 경력이 있는 그는 65년에 소련 군사아카데미를 마치고 귀국한뒤 당군사부(책임지도원)에 발을 들여놓았고줄곧 그곳에서 성장했다.75년에 군사부 부부장,80년에 부장에임명됐는데 이는 그가 野戰계통이 아닌「정치군인」임을 의미한다.
그가 黨군사부장 자리를 84년 金江煥에게 물려준뒤 어떤 군사보직을 맡고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과거경력으로 보아 金正日의 군사보좌역으로 일하는 것으로 관측된다.그는 80년 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으로 선출된뒤 82년 8월에는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발탁됐다가 정치국에서의 군출신퇴진 분위기와 맞물려 86년에 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金斗南은 金正日에게 개별적으로 군사학을 가르친 인연으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져있다.金斗南은 金正日의 개별교수.군사보좌역일뿐 아니라 군내에 유일지도체제를 확립하는데도 큰역할을 했고 비정규무력및 경보병무력의 현대화에 적극 나서 金正日의 지시를 관철시켜왔다고 한다.
金江煥은 萬景臺학원을 거쳐 57년에 소련으로 유학을 떠나 62년에 군사아카데미를 마치고 귀국했다.귀국하자마자 당군사부(지도원)에서 간부생활을 시작한 그는 65년에 민족보위성 작전국 부부장으로 자리를 옮긴뒤 작전국에서 잔뼈가 굵었다 (72년 부국장.77년 국장).80년에는 총참모부 부총참모장을 역임했고 84년부터 당군사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그 과정에서 76년에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80년에 중앙위원겸 정치국 후보위원등 당직에서도 승진가도를 달리다 86년에 金斗南과 함께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물러났다.현재 그의 軍보직은 확인되지 않는다.
金江煥은 민족보위성 작전국과 당군사부등 군사지휘부에서 계통적으로 성장한 핵심인물로 金正日후계체제가 출범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金正日은 군내에 유일지도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75년 봄부터 군에 대한 전반적인 검열사업을 개시,당조직 지도부 검열과에서 인민무력부.총정치국.각급군부대에 「검열그루빠」를 대규모로 파견했다.또 그해 11월에는 1주일간 비공개 인민군당 전원회의가 열려 「인민군대내 당단체등의 사업정형」검열결과가 토의됐는데 金江煥이 이때 능력을 발휘해 신임 을 얻었다고 한다.
어린시절 부모를 따라 간도지방으로 이주해 서당.야학을 다닌 李奉遠 역시 빨찌산출신의 전사자 아버지덕에 萬景臺학원 1기생으로 졸업했으며 49년에 金日成종합대학 철학부에 입학했다.53년에 모스크바종합대학으로 유학갔다가 56년에 귀국해 당조직지도부지도원으로 당간부생활을 시작했다.책임지도원시절에 함경남도당을 담당,반종파투쟁이후의 잔존분자를 색출하는데 공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뒤 조직지도부에서 계속 근무해 67년 부부장까지 올라갔다.
조직지도부시절 金正日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것은 그의 정치배경을 짐작케 한다.
개성시당 책임비서(69년),황해남도당 책임비서(74년)등 당업무를 주로 맡은 그는 개성 시당책 시절 「붉은 시민화」구호를앞세워 개성토박이에 불순분자딱지를 붙여 타지역으로 추방했던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76년 돌연 제2집단군 정치위원으로 파견되면서 「정치군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그해에 군대 정치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일부 당간부들을「정치위원」으로 임명,군복을 입혔기 때문.이는 군내에 金正日 유일지도체제를 확립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나온조치였다.
李奉遠은 86년 이래 인민군총정치국 부국장을 맡아왔는데 총국장을 인민무력부장 吳振宇가 겸하고 있는만큼 그가 사실상 총정치국장이나 다름없으며 이 자리는 군부를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핵심요직이다.
이들 金正日측근들이야말로 軍을 움켜쥐고 北韓사회의 체제동요를막는「수문장」같은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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