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탐구>48.국회 재산공개 실무 맡은 초선 박헌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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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경북영천출신(57세)▲대창국민학교졸업▲고시사법과합격(13회)▲대구지법안동지원장▲대구변호사회회장▲14대 의원 14대 국회의원중에 국민학교만 졸업한 입지전적 인물이 2명 있었으나 지금은 朴憲基의원만 남았다.鄭周永前국민당대표가 정계를 떠났기 때문이다. 朴의원은 몰락해가는 선비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은 못받았지만 독학으로 고등고시에 합격하고,이제는 국회의원까지 당선돼 초선으로는 누구못지않게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경북영천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그의 집안에는 고서가 많았다고 한다.그중에는 할아버지들이 남긴 문집도 있어 朴의원은 자기집안을「유학자집안」이라며 자랑하고 있다.
지금도 마을에 남아있는「芝軒서당」은 할아버지 제자들이 할아버지의 호를 따서 만든 것이라고 朴의원이 설명했다.비록 가세는 기울어갔지만 그는 어릴때 그 서당을 드나들면서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한학을 배웠지만 농사일로 생계를 꾸려야했던「半儒半農」의 아버지는 어려운 살림에다 신학문에 대한 거부감으로 자식의 취학에는관심이 없었다.자칫하면 국민학교 문턱조차 밟지 못할뻔 했다.
들판에서 소에 꼴을 먹이던 그는 어느날 옆집 할머니가 손녀를데리고 국민학교 입학시험을 치러가는 것을 보고 부러움에 따라나선 바람에 그나마 국민학교를 입학할수 있었다.
가세가 더욱 기운 것은 그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일본에 가 있던 형이 객사한 뒤부터다.아버지는 의욕을 잃은듯 술을 가까이 하면서 가사를 돌보지 않았고,재산1호였던 소도 갑자기 병들어 죽었다.장남이 된 그는 집안일까지 떠맡아야했 다.중학교 입학은 꿈도 꿀수 없었다.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책에 몰두해 책벌레라는 별명이 붙었다.집안 어른들이『제발 그 책 좀 치워라』고 짜증을 낸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그는 시험을 치러 출세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으며 목표를 향해 한발짝씩 도전해 나갔다.가장 먼저 치른 시험은 영천군 면서기채용시험.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성년자(18세)라는 이유로 발령을 받지못했지만 그에게는 자신 감을 불어넣어준 소중한 시험이었다.돌아오는 길에 그는 고등고시를 목표로 삼고 고등고시에 앞서 보통고시를 치르기위해「보통고시강의록」이라는 수험서를 샀다.4년만에 보통고시에 합격,군청의 주사로 발령받았다.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다음단계로 고시공부를 시작,대학졸업자가 아닌 경우 치러야하는 예비고시까지 통과했다.
그러나 입신의 길에는 액운이 따랐다.면접(구술시험)을 보러가야하는데 갑자기 열병에 걸린 것이다.열흘을 앓다보니 면접날짜가되었다.『갔다가는 죽는다』며 온식구가 만류했으나 끝까지 고집을꺾지않자 아버지가 나서『할아버지가 과거를 보러 갔다 갑오경장이나는 바람에 시험을 못치른 것이 평생의 恨이었다』며「집안의 恨풀이」로 승낙했다.이불을 뒤집어쓰고 리어카에 실려 겨우 역으로나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이틀간의 시험중 하루가 지나고 나서였다.시험관들을 붙잡고 하소연해 다음날 별도의 구술시험을 치를수있었다. 시험에 합격하고 돌아왔지만 액운은 끊이지않았다.집을 떠날때 미열이 있던 젖먹이 딸이 그사이 숨을 거둔 것이다.합격을 기뻐할 겨를도 없었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군입대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고시에 합격하지 못할경우 사병으로 입대해야 되는데 생계가 막연한 식구들을 생각하니앞이 캄캄했다.
공무원생활을 청산하고 서당에 틀어박혀 코피를 쏟으면서 독학,입시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외다시피 하는 苦行끝에 61년 26세 나이로 판사가 될수 있었다.
마침내 책과 시험은 그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판사생활 15년후 변호사로 개업,그런대로 재력도 축적했다.2남2녀중장남은 검사로 자신의 뒤를 잇는 법조인이 됐고 차남은 박사학위를 취득,『자식농사도 잘 지었다』는 부러움을 사 고 있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그는 국회의원에 도전한다.齊家끝에 治國을생각했고,그의 입지전을 아는 고향사람들의 권유도 많았다.
그러나 시험처럼 생각하고 자신했던 民自黨공천에서 뚝 떨어져버렸다.성공만 알아온 그의 자존심은 상했고,오기도 생겼다.
그래서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무난히 당선함으로써 낙천의 설움도 말끔히 씻었다.평생 교과서와 수험서,그리고 법만 알아온 그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여당체질이었고,몇차례 입당권유를 받자 별다른 고민없이 民自黨에 입당했다. 율사출신으로 원내부총무가 되면서 여러가지 일을 맡았다.
국회운영제도개선소위 위원,정치관계법개정특위 위원,국회윤리특위 위원,예결위원까지 감투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재산공개를 앞두고는 국회공직자윤리위원회의 부위 원장까지 맡았다.변호사인 위원장을 대신해 의원들의 재산공개와 관련한국회차원의 일을 사실상 도맡은 셈이다.
『국민들은 재산공개를 보고는 국회의원들을 모두 도둑이라고 생각하는데,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일부 의원들의 재산형성과정에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다수 의원들은 성실하게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며 동료의원들을 변호한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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