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실명제-"미술 시장 건전 육성 계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금융 실명제 실시가 일반의 성급한 추측과는 달리 현재 극도로 침체된 미술 시장에 활기를 줄 수는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명실상부한 미술품 애호가들이 화랑을 통해 미술품을 구입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내막적으로 미술 시장을 이끌어왔던 투기 목적의 거래는 사라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12일 오후 8시를 기해 금융 실명제가 실시됨에 따라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은 과연 무기명 예금 계좌에서 인출된 현금이 미술 시장으로 흡수될 수 있을까 하는 것.
이에 대해 미술계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권상능씨 (조선 화랑 대표)는 『기껏해야 1회적 거래에 그칠 뿐 계속 유통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가정의 금고에서 잠자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1조5천여억원의 돈이나 두달간의 실명 전환 의무 기간 중 현금으로 인출되는 자금들이 미술 시장으로 유입될 경우 고가의 미술품을 사들일 수밖에 없게 되는데 수억원대의 현금이 계속적으로 순환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자금의 거래가 노출되는 금융 실명제 아래에서는 언젠가는 목돈의 행방이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되므로 1회 이상의 거래는 사실상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가 미술품 자체의 양이 한정적이라는 것도 미술 시장으로 검은 돈이 유입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미술 평론가 최병식씨는 수억원대를 호가하는 작품은 고미술·현대미술을 통틀어 그 수가 극히 일부임을 상기시키고 『방황하는 검은 돈이 설령 미술 시장으로 온다 해도 이를 충족시킬만한 불량이 확보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미술 관계자들은 미술품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낮다는 점도 투기 목적의 검은 돈이 미술 시장을 찾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2년째 불황을 겪으며 극심한 매물 부족에 시달려온 고미술 시장은 이번 조치가 고객에게 심리적인 압박 요인으로 작용해 매매를 거의 예상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현대미술품 역시 2천만원이 넘는 비교적 고가의 작품 거래는 뜸해질 것이라는게 미술상들의 공통적인 인식이다.
금융 실명제 실시와 함께 또 하나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미술품에 대한 양도소득세 부과 실시 여부다.
현재 소득세법상 40∼60%를 부과토록 돼 있는 미술품에 대한 양도소득세는 미술계의 엄청난 반발로 인해 95년1월부터 실시하기로 잠정적인 유보를 해두고 있는 실정.
당초 예술품을 부동산과 똑같은 투기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며 양도세 부과에 크게 반발했던 미술계는 이번 조치로 미술품 거래가 완전 양성화되기 때문에 따로 양도소득세를 부과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낙관적인 견해도 없지 않으나 금융 실명제가 경제 정의를 구현한다는 차원에서 실시되는 것인 만큼 같은 맥락에서 미술품에 대한 양도소득세 부과를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미술품을 잘만 사면 언젠가는 값이 오른다』는 기대감에서 작품을 구입하던 컬렉터들은 미술품 구매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해 화랑으로부터 발길을 돌려버릴 공산이 크다고 미술상들은 보고 있다.
미술계에서는 이같은 컬렉터들이 대체로 미술 시장의 30∼40%를 차지하고 있어 미술 시장의 불황은 더욱 가중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금융 실명제 실시가 지금까지 파행적으로 형성돼온 미술 시장을 건전하게 육성해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게 미술계의 공통된 견해.
조명계씨 (소더비 서울지사장)는 『금융 실명제 실시가 미술 시장의 공개로 이어져 경매제 도입을 앞당기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이번 조치로 경매제 도입의 여건은 마련됐으나 실질적인 실시 시기는 미술 시장에 새 질서가 잡힌 이후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박여숙씨 (박여숙 화랑 대표)는 『진실로 미술품을 좋아하는 이들이 비교적 값이 비싸지 않은 젊은 작가의 작품을 찾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돈의 흐름이 모두 파악되는 만큼 작가와 직접 거래하는 식의 잘못된 작품 거래 행위는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미술계는 당분간 미술 시장의 위축이 심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숨통을 열어 주는 정부의 지원책이 뒤따라줄 것을 고대하고 있다. <홍은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