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측근 세력 당 기관(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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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노동당 중앙에만 김정일 측근이 있는 건 아니다. 지방책임자가 정권 안정의 주요 기반임을 고려하면 김정일이 이들에게 쏟는 관심은 클 수밖에 없다. 믿을만한 인물들이 도당 책임 비서로 포진해 있고 그런 뜻에서 시·도당 책은 중앙당 부장보다도 비중이 높다.
북한은 80년대 중반에 시·도당 책이 시·도 인민위원장,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을 겸하도록 조치함으로써 지방지도 체계를 일원화했다. 지방 체계를 당총비서 김일성이 국가주석을 겸하는 중앙권력 체계와 같도록 바꾼 것이다.
현 시·도당 책들은 대개 만경대 혁명학원 1∼3기 출신 인물들로 알려져 있다. 평양의 강현수, 남포의 박승일, 평남의 서윤석, 평북의 김학봉, 자강의 연형묵, 양강의 이길송, 함남의 현철규, 함북의 이근모, 황남의 백범수, 개성의 임수만, 황북의 최문선, 강원의 임형구 등이 도당 책들이다. 이들 중 제일 젊은 개성시 당책 임수만은 이 학원의 5기다.
92년 12월의 연형묵 총리의 경질과 자강도당책 임명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지방 파견이 「좌천」 의미를 갖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방 발령은 김정일이 신임하는 인물에게 「재도약」 기회를 주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만큼 지방 책임자는 중요하다.
시·도당 책들 가운데 김정일 측근을 가린다면 평남 서윤석·황남 백범수·개성 임수만·황북 최문선 및 도당 책 출신인 김원전을 꼽을 수 있다.
서윤석은 당 조직 지도부에서 잔뼈가 굵은 「조직 통」으로 일찍부터 김정일 측근이었다. 아버지가 1930년대 초반부터 김일성을 따라다니다 38년 겨울 일본 군경의 손에 숨져 해방 뒤 만경대 혁명학원을 다녔다.
서는 조직 지도부 책임지도원·부부장(64년) 등을 거치면서 갑산파 등 당내 반 김일성 세력을 제거하는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부부장 시절 대학을 갓 졸업한 김정일이 조직 지도부에서 커 가는데 협조한 사람이다.
그 뒤 해주시당(70년 8월)·황남도당(70년 12월) 책임자로 나간 서는 노동당이 김정일 유일 지도 체제 확립에 부산하던 75년 10월 조직 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중앙당에 되돌아가 김정일 체제 구축의 선봉장 역을 맡았다. 특히 전 국가부주석 김동규 사건 때 반 김정일 운동의 기수들을 제거하는데 적극적이었다.
그는 또 『김정일 덕성실기』 『김정일 혁명활동 도록』 등을 만들어 당내 학습 자료로 삼게 했으며 김정일 사적물·사적관을 만드는데도 큰 몫을 했다.
그런 경력 때문에 그는 북한의 가장 중요 지역인 평양(78년 5월)·평남(86년 11월) 책임자로 가게 됐던 것이다. 서는 82년 9월이래 당정치국 위원으로 일해온 중앙당 거물이기도 하다. 그동안 당중앙위 후보위원(70년 11월)·중앙위원(80년 4월)·당정치국 후보위원(80년 10월)을 차례로 거쳐 왔다.
백범수는 만경대 혁명학원·김일성 종합대학을 나온 엘리트 당료다. 그의 아버지는 30년대 중반이래 빨치산 활동을 하다 국내 공작 차 압록강을 넘다가 국경 수비대 총에 숨졌다.
그는 당 조직 지도부 지도원으로 당 생활을 시작해 한동안 직업 총동맹위원장·군사령부 정치위원으로 나간 것 외에는 지방 당 사업 및 농업부문 책임자로 일해 왔다. 특히 황해남도(68년 9월 도당 책, 88년 3월 당 농업부장과 89년 10월 정무원 농업위원장을 거쳐 91년에 다시 도당 책)에서 오랫동안 사업해 이 지역 실정에 밝다.
백은 70년 11월 5차 당 대회 때 당 중앙위 후보위원으로, 80년 10월의 6차 당 대회 때 중앙위원으로 각각 선출됐다. 전 북한 고위관리는 『백은 김일성을 아버지처럼, 김정일을 친형제처럼 생각하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임수만은 88년 4월 사망한 임춘추(전 부주석)의 아들로 학창시절 김정일의 친구였다. 김일성에 충성을 다하던 아버지와 친구 김정일의 후광으로 일찍부터 출세 코스를 밟아 왔다.
그는 애초부터 「지방 통」으로 길러진 체제 지탱의 한 기둥이다. 함남도당책(69년 9월)·양강도당책(72년 12월)·남포시 인민위원장(85년 1월)·개성시당책(91년 12월) 등 지방책임자로 줄곧 일해온 것도 그 때문이다. 당 중앙위 후보위원·위원 경력은 백범수와 같다. 앞으로 정치국까지 진출해 김정일 시대를 떠메고 나갈 인물로 꼽힌다.
최문선은 만경대 혁명학원과 김일성 종합대학 특설학부를 마치고 55년 모스크바 대학에 유학한 엘리트다. 58년에 귀국한 그는 당 선전선동부 지도원으로 간부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선전 선동부에서 수년간 일하다가 지방책임자로 나갔다.(62년 과장, 67년 부부장).
특히 선전선동부 부부장 때 당시 직속상관이던 김 도만 부장을 「갑산파 연루자」로 몰아내고 김 일성의 혁명 사상을 당 유일 사상으로 규정짓는데 앞장섰다. 또 「김일성 교시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정연한 체계」를 세운 장본인이다. 그는 80년 10월의 6차 당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역시 지방에서 김정일 후계 체제를 지탱하는 버팀목의 하나며 주로 황해북도를 책임져 왔다.(74년 9월 인민위원장, 76년 6월 도당 책, 중간에 89년 4월 평양시당책을 거쳐 다시 91년 12월 황북도당책).
전 북한 고위관리에 따르면 현 도당 책 외에 앞으로 재기용될 소지가 있는 김원전도 김정일 측근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도 김일성 빨치산 부대 초창기에 죽은 빨치산 자녀로 만경대 혁명학원을 나왔다. 65년 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 시절 김일성의 총애를 받으며 김정일과 급속히 가까워졌다고 한다. 김정일이 「김영주 조직비서 참사실」에서 일을 배울 때 김원전이 뒷바라지를 잘 해준 게 인상에 남았다는 얘기다.
이런 인연으로 김정일 유일 지도 체계가 자리 잡기 시작한 74년에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을 거처 76년에는 중앙당 내의 당위원회 위원장까지 맡을 수 있었다.
다시 79년에 조직지도부 부부장에 되돌아온 그는 양강도당책을 역임했다.(85년 6월∼88년 11월). 84년 12월이래 당 중앙위원인 그는 최근 동정이 전혀 나오고 있지 않지만 김정일의 그에 대한 신임으로 보아 머지않아 다시 도당 책으로 가거나 중앙당 요직에 복귀할 것으로 예견된다.<통일부=김국후 차장·유영구-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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