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8)제89화 내가 치른 북한숙청(30)|전 내무성부상 강상호|남노당파 제거(2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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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조사단은 김일성 수상이 나타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소련말로 『수상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라고 인사하는 등 국가수반에 대한 깍듯한 예우를 갖추었다.
김일성 수상도 조사단에게 『원로에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지요』라고 간단한 답례를 했다.
그리고 그는 옆에 서있던 나를 쳐다보면서 『모두 아는 얼굴들이구먼』하며 특유의 여유를 보였다.
속마음이야 어찌됐든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으며 조사단의 이름을 한사람씩 부르면서 현재 직책이 무엇이냐고 묻는 등 구면임을 내세우며 한사코 친근감을 표시했다.
김일성 수상은 공사석에서 한번 만난 사람이면 세월이 흘러도 그 사람의 이름과 직책을 정확히 기억하는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소련의 조사단 모두가 공화국 정부수립 전 평양에서 근무했거나 수상이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 만난 인사들이어서 이름들을 기억했다.
조사단중 한사람이 수상의 잡담을 가로막고 『시간이 없으니 본론으로 들어갑시다』며 단도직입적으로 분위기를 꺾은 뒤 메모지를 꺼내 수상을 상대로 질문을 시작했다.
조사단의 통역은 김이노겐치가, 수상의 통역은 내가 맡았다.
-우리는 「박헌영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 오라」는 당 중앙의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박헌영은 왜 구속됐습니까,
『공화국 조사기관이 오랫동안 조사한 것에 의하면 한마디로 박헌영은 미국의 간첩입니다. 하루종일 그의 죄상을 얘기해도 다 못하니 우선 공화국 노동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결정된 결정문을 보고 대강을 알도록 하시오.』 김일성 수상은 상기된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나에게 『이봐 강상호, 이 사람들에게 전원회의 결정문을 나누어주지 않고 뭐하느냐』고 화를 냈다.
말하자면 회담 전에 미리 관련자료를 나누어주지 않았다는 지적이었다.
중요한 시기에 「결정적인 실수」를 해서 회담이 끝나면 응분의 문책(좌전)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수상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미리 준비했던 조선말로 된 결정문을 조사단에 건네주었다.
조사단은 조선말로 된 문건임을 확인한 후 바로 김이노겐치에게 건넸다.
-수상님, 결정문에 나온 박헌영의 죄상정도는 모스크바에서 알고 왔습니다. 문제는 박헌영이 조사과정에서 자백을 했는지, 그리고 평화로운 상대에서 조사를 받았는지 등을 알고 싶습니다.
수상은 혼잣말로 『이 사람들이 별것을 다 간섭하고 있구먼…』하면서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박헌영은 자백을 해놓고도 밥먹듯이 그 자백을 번복하고 있소.』
-그러면 그 자백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들이 있습니까.
『그렇소. 우리는 그 자백을 증명할만한 정황증거를 충분히 갖고 있소. 이를 토대로 직접적인 증거를 찾고 있는 중이오.』
-수상님, 모스크바에서는 박헌영의 자백이 없었고 공화국이 확보하고 있다는 정황증거도 범죄구성에 결정적인 작용을 할 수 없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조사단의 말을 듣고 있던 김일성 수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 사람들이 남의 나라 내정을 간섭하러 왔다』며 『더 이상 할말이 없으니 이 정도로 하고 회담을 끝내자』고 했다.
약간 당황한 듯한 조사단은 『수상님, 오해 마십시오. 저희들은 오직 당 중앙의 지시에 의해 왔을 뿐입니다. 당 중앙의 뜻도 결코 형제국의 내정에 간섭하기 위해 저희들을 보낸 것은 아닐 것』이라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의자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김일성 수상은 다시 의자에 앉으면서 『우리 공화국도 엄연한 법치국가이니 염려 말고 돌아가 결과를 지켜봐 달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수상이 회담에 대한 결론을 맺고 나오자 조사단도 자신들이 갖고 온 메시지를 전달했다.
『수상님,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스탈린이 죽고 소련에서도 1인 독재가 비판을 받고 있다는 뜻). 우리는 박헌영이 미제간첩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증거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박헌영을 죽이지 말고 석방하는 것이 수상님을 위해서도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말을 들은 수상이 노발대발 할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조사단을 설득했다.
『공화국은 범죄에 필요한 모든 직·간접증거를 확보한 후 정당한 재판과정을 통해 박헌영을 처리할테니 조금도 염려말고 나의 이같은 뜻을 모스크바 동지들에게 전해주시오.』
김일성 수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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