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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원작 영화 두 배 즐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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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D H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영화화한 ‘레이디 채털리’가 조용히 흥행 몰이를 하고 있다. 불과 5개 상영관에서 개봉했을 뿐인데 1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모으며 입소문을 타고 있다. 훌륭한 원작 소설을 영화화해 성공한 경우다. 사실 뛰어난 소설을 영화화해 성공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각별한 느낌을 자아낸다.

‘레이디 채털리’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여러 판본 가운데 제2 판본을 영화화한 것이다. 작품 배경과 사건들은 원작처럼 영국식이라기보다는 감독의 출신과 같은 프랑스식이다. 하지만 다소 고지식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원작의 내용을 충실히 그려놓았다. 그간 많은 『채털리 부인의 사랑』 영화가 있었지만 이번 ‘레이디 채털리’처럼 원작의 향기를 잘 그려낸 작품은 없었다는 게 평단의 반응이다.

유명한 원작을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연출자가 느끼는 중압감은 무척 클 것이다. 그러나 관객인 내 개인적인 느낌을 말한다면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들을 보러 갈 때는 두 배쯤 더 설렌다. 원작과 영화의 상관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더 풍성한 영화 관람 기록을 마음속에 남길 수 있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대표작 『피아노 치는 여자』를 영화화한 ‘피아니스트’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화한 ‘프라하의 봄’ 등은 원작보다도 재미없었다고 기억된다. 작가들도 실망스러움을 표현했다고 할 정도니 원작을 감동적으로 읽은 독자야 달리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어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데 아예 동의하지 않기도 한다고 들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 같은 사람이 그렇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가가 영화화 저작권은 양도하지만, 영화와 소설은 별개니까 어떻게 만들든 나와는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한다고 한다.

원작과 영화의 격차는 영상과 활자 문화의 격차라고 생각된다. 상상이라는 코드로 감상하는 활자 매체와 눈으로 감상하는 영상 매체는 애초에 수용 형태가 다르다. 수용자가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활자문화와 달리 시각과 음향만으로 수용자가 반응케 되는 영상 문화의 속성은 그 수용 방식이 따로 있다. 이는 어느 매체가 더 우월한가 하는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때론 영화를 좋게 보고 감동해서 원작을 읽었더니, 이에 못 미치는 경우도 적잖음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수용 방식 차이와 함께 생각해볼 문제는 영화는 러닝타임이라고 하는 제한된 시간에 원작의 모든 것을 해석해 연출해야 하는 부담이 있을 것이다. 아마 ‘레이디 채털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펼쳐놓으려 하지 않고, 러닝타임도 비교적 원작의 호흡에 맞게 길게 가져간 점이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소설뿐아니라 만화 또는 다큐멘터리 기록을 토대로 영상화하는 경우도 많다. 영화가 눈부신 기술적 진보를 바탕으로 여러 장르의 원작을 영화화해 성공하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요즘 소설을 출간한 작가들에게는 책이 잘 팔리느냐는 인사말과 함께 ‘원작 저작권도 팔렸는지?’ 하는 질문을 꼭 곁들인다. 작가에겐 적잖은 수입을 보장하는 원작 사용료도 중요하지만, 영화화됐을 때 새로운 층위의 관객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외 영화가 성공했을 때 커지는 원작에 대한 관심도 의미가 있다.

원작을 출간한 출판사는 영화화되는 것을 반긴다. 영화 개봉에 맞춰 영화 스틸 사진을 활용해 새롭게 표지를 바꾸는 ‘표지갈이’를 하거나 ‘영화 원작’임을 밝히는 광고 문안을 띠지에 큼지막하게 박아 넣는다.

영화와 원작, 양자에게 ‘서로 달라도 감동은 하나다’는 낡은 수식이 새삼스러울 따름이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