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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층의 해외도피 풍조(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온갖 비리와 부정이 드러나고 있지만 정작 비리와 부정을 저지른 피의 당사자들은 그 상당수가 국외에 나가 있다. 어제 오늘의 신문을 봐도 뇌물수수 사건과 관련된 한전 부사장이 국외로 도피했다는 기사가 나오고,이어 안병화 전 사장도 거액 수뢰에 관련돼 있지만 그 또한 이미 미국으로 나가 있다는 것이다.
포철의 박태준 전 회장에서부터 5,6공 금융계의 실세 이원조의원,율곡사업 비리에 연루된 김종휘 전 청와대수석,최근 정보사 정치테러 사건과 연루된 보안사의 전 정보처장까지 찾고 보면 모두가 해외에 나가 있다. 보사부의 전직 장관도 한의약파동이 그토록 시끄러웠지만 친지방문차 미국행이 몇달째 계속되고 있다.
이렇듯 문제의 핵심인물은 빼놓은채 수사를 진행하고 있으니 사건의 진상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채 여론재판만 무성하다. 포철 박 전 회장이 얼마의 돈을 업자들로부터 먹었다더라는 식이고,이어 후임자와 몇몇 하청기업체 사장이 구속되는 것으로 그 사건은 끝이 나고 국민들은 또 다른 지도층 인사의 신종범죄에 관심돌리는게 요즘의 세태다. 사건의 당사자는 국외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감감한 채 사건은 이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유야무야 끝나가는 기분이다.
이들이 모두 누구인가. 바로 엊그제까지 세상을 자기 손에 넣은듯 떵떵거리던 이 사회의 거물들이고,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아닌가. 문제가 발생했으면 외국에 나가있다가도 당장 귀국해 사태의 전말을 밝히고 오해의 소지를 없애야 할터인데 오히려 야반도주한 빚쟁이처럼 한번 출국해버리면 종무소식이다.
이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도망가는 방식도 갖가지다. 들통날까봐 미리 용의주도하게 도망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부 당국의 느슨한 감시망을 몰래 빠져나간 사람도 있다. 눈치로 봐선 당국에서 사전에 정보를 알려주어 미리 도망치게끔 방조한 느낌마저 드는 출국도 눈에 띈다.
어떤 출국이든 그들이 진정한 사회지도층 인사라면 지금이라도 귀국해 지도층 인사답게 정정당당하게 밝힐건 밝히고,책임질 일은 책임지는 떳떳한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일단 급한 불을 피해놓고 보면 언젠가는 무사하겠지 하는 식의 대응은 결코 지도층 인사로서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 정부나 사직당국은 세월이 흐르면 유야무야되겠지 하는 이들의 사고방식을 고쳐주기 위해서도 사건의 진상을 끝까지 추적해 죄가 있다면 이에 대한 응분의 벌이 따르도록 엄격한 법집행 자세를 유지해야 하다.
이를 위해 사법당국은 장기적으로는 범인 인도협정 등 사법공조체제를 외국과 공고히하는 노력을 가속화해야 할 것이다. 바람몰이식의 여론재판으로 끝내지 말고 지도층 인사들의 사회적 책임은 무한한 것임을 자각케하는 계기가 되도록 보다 끈질긴 당국의 추적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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