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옛 지도, 만여점 소장 국내 최다|고서, 골동품점 뒤지기 3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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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국립수산진흥원 해양과장 한상복씨(53·이학 박사)는 요즘도 희귀한 우리나라 옛 지도가 있다는 소문이라도 들으면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
외국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반도의 옛 지도를 주머니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구입했다가 여비가 모자라 낭패를 당했는가하면 소중한 자료인줄 믿고 힘들게 구입한 지도가 휴지나 다름없는 것을 알고는 한동안 허탈감에 빠지기도 하는 등 「지도수집 30년」이 우여곡절로 점철된 세월이었건만 아직도 새로운 지도라면 귀가 솔깃해진다.
한씨가 이렇게 수집한 지도가 무려 1만 여종에 달하며 우리나라와 관련된 지도 중 희귀본 20여종은 5백부씩 복사,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는가 하면 20여 차례에 걸쳐 전시회도 가졌다
특히 91년2월 경주에서 세계의 해양학자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해상실크로드 탐사 국제회의에서 지도와 관련한 학술논문을 발표해 호평을 받는 등 해도연구의 권위자로 학계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업무시간외의 시간 대부분을 고지도 수집과 수집한 지도를 연구하거나 지도와 관련된 글을 집필하는데 할애하는 한씨를 주변에선 『고지도 수집광』또는 『한국지도 박사』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는 지도수집과 연구는 어디까지나 취미생활이며 『지도에 관해 누구와도 토론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밖에 안 된다』며 겸손해 한다.
젊은 시절 옳다고 믿으면 물러설 줄 모르는 성격이 윗사람과 적잖은 마찰을 빚어 직장을 여러 차례 옮기는 등 인생역정 역시 지도수집과정 못지 않게 우여곡절이 많았던 한씨가 지도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군대시절부터.
서울에서 태어나 치과의사인 아버지의 근무병원 이동으로 중학교는 전북 무주에서, 고등학교는 대구에서 마친 한씨는 서울대 해양학과를 졸업한 63년 ROTC 1기 포병장교로 입대, 포 사격 기술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군사지도 독도법에 익숙해졌으며 이때부터 지도를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불어 휴가 때 시간을 내 옛 지도를 수집하러 다니면서부터다.
한씨는 모교인 서울대에서 해양학 강의를 맡은 70년부터 본격적인 지도수집에 나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틈만 나면 헌 책방과 골동품가게를 뒤지는 게 습관이 됐다.
70년 1741년대의 조선지도를 3개월 치 봉급을 주고 구입, 생활비가 모자라 몇 달간 궁핍한 생활을 했는가하면 79년 해양학연구발표회 참석차 호주에 갔다가 1787년 프랑스인인 라 페르지가 외국인으로서 최초로 한국 해양을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제작한 극동아시아의 해도 원본을 여비의 절반이 넘는 5백달러에 덜컥 사고는 외국에서 1개월간 거지신세가 되는 등 한씨가 그 동안 구입한 대부분의 지도엔 각종 추억이 배어있다.
동해가 일본해로 굳어지는 빌미가 됐던 1787년의 라 페르지의 극동아시아 해도, 조선을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하멜 표류기를 바탕으로 프랑스의 지도제작자 드 페르가 1705년 제작하면서 부산의 지명을 처음으로 표시한 동아시아지도, 조선초기학자였던 권근이 1402년 제작한 세계지도 등은 특히 귀중한 자료로 애지중지하고 있는 것들.
한씨는 일본 용곡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권근의 세계지도의 1470년 필사본을 91년2월 경주에서 열린 해상실크로드 탐사 학술대회에서 「지도네 나다난 동서교역」 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최초로 공개, 세계 해양학자들로부터 『비록 아메리카대륙이 빠졌지만 아프리카 대륙을 실제와 유사하게 그린 뛰어난 지도』라는 경가를 받았으며 부산지명이 최초로 표기된 드 페르의 지도는 6월초에 공개했다.
이밖에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라는 사실을 입증하는데 도움이 되는 19세기 후반 일본과 프랑스해군·영국인 등이 제작한 한반도의 동해지도, 시대별 부산항의 발전상을 알 수 있는 1859년 이후의 부산항지도를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90년 이후 부산항 관련 지도만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전시회를 개최, 부산 시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씨는 올해까지 부산항과 관련한 지도정리와 전시를 마무리하고 서울이 수도가 된지 6백년째인 94년 서울과 관련한 지도 등 자료전시회를 가질 계획이다.
70년대말 서울대교수를 그만두고 81년부터 87년까지 호주의 플린다스 해양기상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하면서 외국인이 만든 우리나라 주변 지도를 많이 수집했다는 한씨는 『서양인이 우리나라의 지도를 만들기 전 대부분 한반도 주변을 탐사한 것이 확인됐다』며 『지도는 제작당시의 자연과학·사회과학의 발전정도와 당시대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물』이라고 말했다.
90년부터 국립수산진흥원에서 해양과장을 맡고있는 한씨는 미국이 태평양상공에 쏘아 올린 인공위성으로부터 한반도 주변해역의 수온분포를 매일 수신, 조업중인 어선에 즉시 제공해 고기잡이에 도움을 주는 일등 본업도 취미생활 만큼이나 열심히 하는 공무원이다
『비록 힘들게 수집한 지도지만 독점할 수 없다』는 생각에 90년부터 소장지도 중 귀중한 자료 20여종을 사비를 들여 5백부씩 인쇄, 대학도서관 등 각계에 기증해오고 있는 한씨는 요즘 부산항관련지도 전시 마무리 작업과 내년에 계획하고 있는 서울 6백년 자료전시회에 선보일 지도를 정리하느라 더위도 잊은 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부산=강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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