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생각하는 6·25/서광선(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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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 선생님.
저는 지금 이 글을 미국 태평양 해안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 샌프란시스코의 신학대학에서 쓰고 있습니다. 여름 강의를 맞아 이곳에는 6월초순에 왔지만 한국 소식에는 별로 접하지 못하고 이곳 신문에 한국 이야기가 크게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믿어보려 하고 있습니다.
○군사문화 청산 문턱에
이곳 텔레비전과 신문에서는 계속 범죄 이야기가 주제입니다. 할머니가 두 손자를 살해했다느니,경찰이 마약을 취급하는 청소년들에게 총을 맞고 죽어간다느니 하는 끔찍한 이야기들 입니다. 경제문제 때문에 실업률이 높아간다는 이야기,정부의 예산이 삭감되고 그렇게 되면 제일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이 사회 복지시설이고 다음으로는 대학이라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앓고 있는 경제 불황이 이 나라에서도 문제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뒤숭숭한 가운데서도 여기에 오자마자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떠드는 것은 역시 아버지의 날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날을 맞아 아버지에게 드릴 선물 파는 광고들이 요란했습니다. 아버지의 날을 맞아 아버지를 생각한다는 것이 결국은 선물 상품 광로고 요약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느끼게까지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1년 내내 아버지를 공격하고 미워하고 비난하다가 하루 아버지의 날이라고 해놓고 장사하고,카드 한장 보내고 전화하고 밥 사주고 하는 이 나라 문화에 대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우스운 것 같기도 하며 아리송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여성 열사람 가운데 세사람이 근친에의한 성폭행을 당했고 그 가운데 한 두 사람은 동네 아저씨가 아닌 바로 자기 아버지로부터 성폭행 당했다는 보다가 있는가 하면,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영화는 국민학교에 다니는 여자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성폭행자로 고발해 재판받게 하고 끝내 감옥에 보내는 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자고 아버지의 날을 제정한것 같은데 결국 아버지를 부끄럽게 하는 것같아 마음이 편안치 않습니다.
풍요하게 아름다운 도시의 한 구석에서 경제 불황과 폭력,정신적 혼란의 한가운데서 허덕이고 있는 미국사회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지금 6·25를 기억하고 있다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43년전 이야기입니다. 선생님은 올해 마흔이시니까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들어가는 해에 태어나신 거지요. 그야말로 「아프레 게르」,전후세대입니다. 6월하면 한국전쟁을 생각하는 우리 세대에 대해 의아해하는 세대가 지금 한국사회를 이끌어나가고 있습니다. 선생님 세대는 우리 세대하고 다른 점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우리 앞날을 생각해 봅니다.
○전후세대가 역사 주역
선생님 세대는 분단은 알고 있지만 이 땅에서의 전쟁은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 40대 남자들 가운데는 월남전에 참전했던 이들이 있지요. 그리고 월남전 때문에 우리나라 군부 지도자들이 정권을 장악하기도 했던 것이지요.
전쟁 없는 평화의 시대에서 살면서 전쟁에 의해 장악한 지도력을 정권장악에 과시했다고 하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전쟁 문화를 청산하고 군사문화 역시 청산하는 평화의 역사와 평화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려고 하는 역사의 문턱에 서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단과 전쟁,가난과 폭력에 짓눌려왔던 우리의 삶이 화해와 평화,나눔과 사랑의 삶으로 전환되고 개혁되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과 선생님의 세대가 그 역사 창조의 주역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해방의 지도자 모세가 40년동안 광야를 헤매다 가나안 복지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죽어가는 이야기가 성서에 있습니다.
새로운 땅 가나안에 모세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해방을 위해 전쟁으로 피흘린 세대의 모세는 새 땅에 맞지 않다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화해와 평화 이뤄가야
손에 피가 묻어있는 세대는 새로운 땅에서 평화를 만들어낼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그러나 분단의 희생자로서 성장한 세대가 새로운 땅,평화의 역사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김 선생님. 6·25와 오늘의 젊은세대,전쟁을 모르고 자란 세대,그러나 분단의 아픔을 딛고 살아논 세대의 책임을 생각하면서 멀리서 사랑의 기도를 보내드립니다.<이화여대 대학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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