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뒤지나 가능성 충분-서울 온 아시아영화 전문가 레인즈씨 진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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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앨프리드 히치콕·캐럴 리드의 모국인 영국은 한때 세계 최 정상급의 영화 대국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영국 영화는 그런 영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몰락해 있다. BBC·채널 4등 방송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영화를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창작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영화이론 내지 영화비평은 날로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피터 월렌·스티븐 히드 등 쟁쟁한 이론가들을 배출한 영국의 영화 비평계는 세계의 영화비평 문화를 주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한국 영화에 관한 자료 수집을 위해 방한중인 영국의 토니레인즈씨도 이론대국인 영국의 「알아주는 비평가」중 한사람이다.
올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으로 활약했던 그는 특히 아시아 영화에 관한 한 서구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영국의 유력 지인 『가디언』, 영화전문지인 『사이트 앤드 사운드』등에 정기적으로 아시아 영화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 있는 그는 중국 영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비평가가 매스컴을 타는 것이 우습지 않느냐」는 이유로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하는 그를 어렵사리 만나 한국 영화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그는 『한국 영화의 수준은 현재 아시아에서 톱 클라스인 중국에 비하면 분명 뒤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자기 비하에 빠질 정도로 낙후된 것은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한국영화의 가능성을 치켜세우는 그가 내세우는 근거는 한국 영화가 대략 1년에 4∼5편 정도는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월드 클라스의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정도수준의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내는 나라는 아시아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박광수·장선우·이명세 등의 젊은 감독들을 특히 주목한다는 그는 『젊은 감독들의 성장기인 70∼80년대가 한국 사회의 커다란 격변기였던 탓인지 이들의 영화에선 지나치게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이 큰 것 같고, 그래서 이것이 오히려 다양한 영화적 상상력 계발에 장애를 추는 듯하다』고 평했다.
서구 관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보다 보편적인 영화 언어 개발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가 한국의 젊은 감독들에게 보내는 충고다.
한국에 와서 본 영화 중에서 『첫 사랑』『서편제』『화엄경』 등이 인상적이었다는 그는 특히 이명세 감독의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첫사랑』에서는 프랑스의 거장 알랭 르네의 후기작품을 연상시키는 과감한 심리적 리얼리즘 추구가 돋보였는데 이 영화가 흥행·비평양면에서 모두 실패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 영화가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영화 홍보보다 체계적이고 전문화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
특히 영화 진흥공사가 지금처럼 적은 인원에다 낮은 수준의 전문성밖에 갖추지 못한 채 국제업무를 담당해서는 곤란하다고 따끔한 충고를 가하기도 했다.
현재 40대 중반이라고만 자신의 나이를 밝힌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수재로 10대 후반부터 소형영화 제작으로 영화에 입문한 이래 계속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해왔다. 그 동안 『전영; 중국영화 45년사』『파스빈더』등 4권의 저서를 출간한 바 있는 그는 내년에 런던에서「한국 영화의 신세대」라는 제목으로 영화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있다. <임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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