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혁 6단 「끈기의 승부사」화려한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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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집반, 반집, 반집 ,3집반, 반집. 이 희한한 기록은 유창혁 6단이 최근의 빅 승부에서 거둔 승점이다. 두달 사이 각종도전기와 세계대회에서 연속 5승을 하는 동안 불과 6집을 이겨 1승에 평균 1.2집. 한국기원의 확인에 따르면 바둑계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한다. 유 6단은 본시 중반 KO승을 자랑하는 강타자였으나 올해부터 갑자기 딴사람처럼 달라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유 6단에겐 「세계최고의 공격수」라는 찬사와 함께 「덜컥수의 명인」이란 불명예스런 별명이 항시 따라다녔다. 승부의 기복도 무상해 잘 풀릴 때는 천하의 그 누구도 맥을 쓰지 못했지만 반대의 경우 누구에게나 쉽게 꺾였다.
유 6단은 또 미세한 승부에 턱없이 약했다. 끈기와 체력이 부족해 종반에만 가면 언제 실족할지 모르는 불안한 존재였다. 바둑의「질」은 최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승부에는 번번이 져 지난해엔 급기야 57%라는 비참한 승률을 기록하고야 말았다.
그 유창혁 6단이 93년도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변했다. 『이창호의 신중과 끈기를 배워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유 6단은 뼈저린 반성을 통해 좋아하던 술을 줄이고 「단학선원」에 다니며 단전호흡으로 집중력을 높였다. 그는 올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18전 18승을 올려 바둑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중견프로기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유창혁 마저 끈기가 강해졌으니 이제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4월에 시작된 왕위전 타이틀매치는 유 6단이 진정 변신에 성공했는가 하는 중요한 시험무대였다. 「왕위」는 유 6단의 유일한 타이틀. 그는 다른 기전의 출전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도전기에 집념을 보였으나 4월 16일 첫판에서 도전자 조훈현 9단에게「반집」으로 역전 패했다. 유 6단이 끈기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정상급의 그것에는 아직 못 미친다는 의구심이 뒤를 따랐다.
그러나 유 6단은 30일의 제2국에서 「1집반」차로 역전 승했고 5월 10일의 제4국과 25일의 제5국에서 연속「반집 역전승」을 이끌어내 이창호에 필적하는 끈기를 보여줬다.
6월 1일엔 이창호 6단의「명인」에 도전해 첫판에서 3집 반승. 곧 북경으로 날아간 유 6단은 5일 후지쓰배 세계대회 8강 전에서 일본의 오타케(대죽영웅) 9단을 또다시「반 집」으로 제쳐버렸다.
이리하여 올해 전적은 40전 35승 5패(88%)로 승률 1위.
『나는 승부를 너무 간단하게 생각해왔다. 이제는 승리가 고통의 대가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승리를 위해서는 어둡고 지루한 고행을 견뎌야만 한다.』
빛나는 감각과 강렬한 행마로 팬들을 사로잡았으나 승부에서 허망함을 노출시키곤 했던 유 6단이 이제는 수도자 같은 고행의 세계에 눈뜨기 시작했다. 기풍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현재까지 유 6단의 변신은 매우 성공적이다. 유 6단은 11일 왕위전 도전기 제6국을 둔다. 현재 3승 2패니 이날 승리하면 왕위를 방어하게 된다. 또 7월 3일엔 일본 오사카에서 조치훈 9단을 꺾은 아와지(담노수삼) 9단과 후지쓰배 결승진출을 놓고 겨룬다. 유 6단은 현재 한국기원에서 가장 바쁜 기사다. <박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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