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아프간 피랍 사태를 되짚으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 집단 피랍사건이 발생한 지 20일이 넘었다. 그 사이 두 목숨이 희생됐지만 아직 사태 해결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조만간 사건이 종결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사태의 장기화에 대비하려면 충격과 혼란에서 벗어나 안정과 냉철함을 되찾아야 한다.

 사실 그간의 경과를 되짚어 보면 사태에 대한 냉철한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간과하기 힘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님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피랍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처방식이 그러하다. 그동안 정부는 사태의 조기 종결이 가능하다고 믿고, 이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닌가 싶다. 피랍사건 직후 대통령이 직접 나서 한국군의 철수 의사를 공표함으로써 납치 세력의 요구를 즉각 수용한 것이나, 특사를 파견해 아프간 정부를 설득하려 한 것 등이 그런 맥락을 시사한다.

 인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이런 노력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스물세 명 인질의 생사와 안위가 걸린 문제에 정부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근거는 없다. 비판의 초점은 대외적 위기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노력 여부가 아니라 그에 대한 대응방식에 있다.

 다른 나라가 겪었던 인질 사태의 전례들을 살피면 인질 구출을 위한 협상에 몇 달씩 소요되는 것이 예사임을 알 수 있다. 정부가 피랍사건에 대한 대응에 나서기 전에 이런 전례들을 얼마나 검토했는지 궁금하다. 인도주의에 호소한다는 정부의 전략도 우리의 희망을 떠나 납치세력의 의도나 아프간 정부의 입장을 숙고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문제해결의 전면에 나선 것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국가적 위신에 부담을 초래할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경솔한 조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프간 주둔 한국군의 철수 결정이 납치세력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태로 결정된 것도 유감이다. 철군은 예정된 것이고 오히려 철군의 핑계를 찾던 차에 잘된 일이라고 판단했을지 모르나 테러 협박에 굴복한다는 인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평화를 위해 비전투병을 파병한다는 명분을 스스로 부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대외적 위기상황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방식이 미숙하다는 사실은 국제적 비교의 관점에서 한결 분명해진다. 독일은 현재 자국민이 아프가니스탄에 피랍돼 있고, 그동안 인질의 일부가 희생되는 등 한국과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인질 사태에 대한 대응에서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 준다. 집권 기민당의 메르켈 총리는 테러세력의 협박에 결코 굴복할 수 없으며 아프간 파병을 견지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연정 파트너지만 대외정책에서 곧잘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민당도 이 입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독일 정부가 인질에 대한 위협을 감수하면서도 단호한 대응을 선택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사태의 재발을 막고 국제사회에서 국익을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인질의 희생을 보도하는 독일 언론의 태도나 여론에서도 슬픔이나 분노의 감정은 찾기 어렵다. 인명의 소중함을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닐 게다. 인질 사태와 같은 대외적 위기상황에서 국가가 취해야 할 행동은 인질 가족의 희망이나 일반 국민의 정서보다는 국익과 국가 이성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질 사태의 빈발 정도나 국제적 위상에서 차이가 있는 나라를 우리와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국제정치에 대한 이해와 대응에서 우리 정치의 수준이 실망스러운 것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비상사태에 당면했지만 우리 정치인들의 행태는 한결같다. 앞 다퉈 희생자 가족을 조문하거나,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며 공개서한을 보내거나, 심지어는 무작정 미국 방문 길에 나서기도 한다. 국민 일부의 정서에 영합할지 몰라도 사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제스처를 남발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우리 정치의 국제경쟁력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국내정치의 술수에는 밝지만 국제정치의 안목에는 어둡기 짝이 없는 우리 정치인들은 말하자면 국제경기에는 뛸 수 없는 국내경기 전용 선수인 셈이다.

독일에서

안병직 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