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내기들의 노스탤지어, MBC 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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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현재 서울엔 두 개의 프로야구팀이 있다.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 그러나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서울엔 오직 한 팀뿐이었다. MBC 청룡. ‘한국 야구의 요람’ 동대문구장을 홈구장 삼아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개막전을 치른 팀이다. 1990년 LG에 매각되면서 MBC 청룡의 운명은 끝났다. 그러나 토박이 서울팬들에게 MBC 청룡은 ‘영원한 서울팀’이다. 이제 40~50대가 된 서울팬들은 이종도의 타구가 동대문구장 왼쪽 담장을 넘어가는 순간 가슴 한복판을 꿰뚫던 뜨거운 감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MBC 청룡, 그 영원할 것 같은 노스탤지어.

1990년 1월 18일 서울 여의도의 럭키금성 그룹 쌍둥이 빌딩. 1985년 5월 청보 그룹이 삼미 그룹으로부터 삼미 슈퍼스타즈 프로야구단을 70억원에 인수한 데 이어 두 번째로 프로야구단을 사고파는 행사가 벌어졌다. 이 프로야구단의 원래 주인은 문화방송(MBC)이었고 새 주인은 럭키금성 그룹이었다. 사는 값은 요즘으로 봐도 결코 적지 않은 100억원이었다. 럭키금성 그룹은 방송협찬금 형식으로 30억원을 더 얹었다. 값을 후하게 쳐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서울 연고구단의 이점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구단 자체로는 어차피 흑자 운영이 어려운 가운데 시장 규모가 크다 보니 홍보 효과에 대한 기대가 컸다. 실제로 럭키금성 그룹은 ‘락희(樂喜)’에서 비롯한 다소 촌스러웠던 그룹 이름을 LG로 바꾸고 프로야구단에 새로운 이름을 처음으로 붙여 톡톡히 효과를 봤다. 구단을 인수한 첫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까지 했으니 돈으로 바꿔 셈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였다.

게다가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덤이 있었다. 전 주인인 MBC의 단골손님들이었다. 그들은 그냥 단골이 아니었다. 이길환(선린상고)ㆍ하기룡ㆍ이광은ㆍ신언호(이상 배재고)ㆍ유승안(경동고)ㆍ김재박(대광고)ㆍ이종도(중앙고) 등 MBC 창단 멤버는 서울 골수팬들에게는 동대문운동장에서 까까머리 때부터 응원한 선수들이었다. 1980년대 잠실구장 1루쪽 관중석은 이들의 차지였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치르고 이듬해 입단한 이해창과 1986년 신인왕 김건우(이상 선린상고)에 이르기까지 MBC의 서울지역 고교야구 스타플레이어 출신 선수들의 이름은 잠실구장 1루쪽에서 때로는 칭찬으로 때로는 욕설로 하루도 그칠 날이 없이 터져나왔다. 어찌 보면 거친 듯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동대문운동장에서 잔뼈가 굵은 진짜 야구팬이었다.

MBC와 해태 타이거즈가 맞붙은 1983년 한국시리즈. 애초 예상과 달리 해태는 3연승으로 일방적으로 앞서 나갔다. MBC가 벼랑 끝에 몰린 가운데 맞은 잠실구장 4차전. 1-1로 팽팽하게 맞선 11회 말. 1사 후 이해창과 이종도가 잇따라 좌전 안타를 때려 1승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다음 타자 최정우가 2루 땅볼로 아웃되는 사이 2루주자 ‘쌕쌕이’ 이해창이 쏜살같이 홈으로 파고들었다. 선린상고 시절 동대문운동장에서 종종 펼친 주루 플레이였다.

재일동포 출신 해태 포수 김무종은 1루수 김일환의 정확한 홈 송구를 받아 이해창과 부딪치면서도 미트에서 공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1, 3루쪽 관중석을 가득 메운 MBC 팬이나 해태 팬이나 주심이 아웃이라고 해도, 세이프라고 해도 항의하기 어려운 장면이 홈플레이트 위에서 펼쳐졌다. 뽀얗게 인 먼지가 가라앉는가 싶더니 황석중 주심이 아웃을 선언했다. 1루쪽 관중은 누구 하나 이해창의 다소 무리한 듯한 주루 플레이에 야유하지 않았다. 그날 경기는 결국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해태는 4승1무로 한국시리즈에서 처음 우승했고 MBC는 그 뒤 한국시리즈에 나서지 못했다.

1981년 5월 MBC는 창사 2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프로야구단 창단 계획을 세웠다. 1970년대 중반 재미동포 홍윤희씨가 매우 구체적인 프로야구 출범 계획을 갖고 한국에 온 적이 있지만 국내에서 프로야구를 해보자고 나선 건 MBC가 처음이었다. 그때 MBC는 여러 개의 구단을 만드는 게 아니라 프로축구 할렐루야처럼 아마추어 우수선수로 1개 팀만 만들어 프로야구의 싹을 틔워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이웃 일본의 프로야구 출범 과정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이 과정에서 판이 커지면서 1981년 12월 1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6개 구단이 참여한 가운데 한국프로야구위원회 창립 총회가 열리기에 이른다.

MBC는 당연히 프로야구 창립 회원이었다. 그러나 공영방송사가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했다. 실제로 MBC는 프로야구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3년 정도 구단을 운영한 뒤 사기업에 넘기겠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뤄지던 구단 매각이 1989년 12월 이뤄졌다. 길지 않은 MBC 프로야구단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이었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MBC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선수 겸 감독 백인천(경동고)은 전무후무한 4할대의 타격왕이 됐고 이종도는 개막전 만루홈런으로 한국프로야구의 성공적인 출발을 알린 영웅이 됐다. 이제는 서울을 공동 연고지로 쓰고 있지만 MBC는 1984년 시즌까지는 동대문운동장과 잠실구장을 혼자 사용했다. 서울지역 구단의 이미지를 굳힐 수 있는 충분한 기간이었다. 이제는 30대 후반이 넘었을 서울의 야구소년들은 MBC 점퍼를 입고 학교에 갔다. 1982년 어느 날 프로야구단 점퍼를 입고 다니는 어린이와 그렇지 못한 어린이 사이에 위화감이 조성되고 있다는 기사가 종합일간지 사회면 톱기사로 실릴 정도였다.
MBC 청룡. 서울 토박이 야구팬들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신명철 스포츠2.0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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