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연구가」서 선량으로/호남운동권대부 민주박석무(의원탐구:3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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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교수추천 받고도 「시위경력」 시비로 좌절/수배 피해다니며 저서 집필
▷약력◁
▲전남 무안출신(52세) ▲광주고·전남대 법대·동대학원 졸업 ▲중·고교 교사 ▲국제사면위원회 광주지부 총무 ▲국민운동본부 전남공동의장 ▲호남민교협 공동의장 ▲13,14대의원 ▲유네스코 한국위원 ▲국회교육위 민주당 간사
한 여자소리꾼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서편제』가 국회에서 상영됐던 지난 15일 관중석 한구석에서 박석무의원(민주)이 하염없이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이번 임시국회에서 교육부의 대입부정 명단공개누락건을 터뜨려 교육부를 초토화시킨 강골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박 의원은 서편제를 보면서 어린시절 들었던 남도가락의 추억이 되살아났고 자신의 한을 끝까지 소중하게 간직한 여주인공 「송화」의 삶에 자신의 역정이 자연스레 되새겨져 울었다고 한다.
박 의원의 원래 꿈은 국회의원도,10여년이상 했던 교사직도 아니었다. 박 의원은 면암 최익현선생의 수제자였던 증조부에서부터 조부·부친으로 내려오는 한학자집안 출신이다. 꼬마시절부터 조부가 사랑방에서 운영하는 서당과 「괴산재」라는 마을 서당을 오가며 각종 한서를 접했다. 고교(광주고)때 이미 웬만한 한서를 번역할 정도의 실력을 지니게 된 그는 전남대 법대에 진학,다산 정약용연구를 삶의 목표로 세워나갔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시대상황은 온통 불의로 다가왔다. 대학 2년때인 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무기정학과 함께 처음으로 구속됐고 65년에는 월남파병 반대시위로 퇴학과 함께 강제입영돼 삶의 방향이 비껴가기 시작했다.
69년 복학했으나 3선개헌 반대시위를 주도해 「요시찰」 딱지가 늘 붙어다녔다.
학자가 되기위해 대학원에 진학한 박 의원은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이란 졸업논문으로 호평을 얻었다. 후일 문교장관으로 「둔마」라는 별칭을 받았던 유기춘전남대총장이 「학교에 남으라」고 권했고 교수회의도 그를 교수요원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서슬퍼렇던 유신전야의 중앙정보부는 「절대불가」를 통보해왔다. 「교수의 꿈」이 깨진 것이다.
그래서 일단 광주 북중의 영어교사로 취직했으나 73년 유신반대 유인물인 전남대 『함성』지 사건에 연루돼 1년여 교도소 생활을 했다. 그후부터 완전히 유신반대의 길에 들어서 투사의 삶과 실의사이를 오갔다.
정식교사로 임용이 안돼 전남북 일대의 중·고교를 떠돌며 낮에는 임시교사로,밤에는 국제사면위원회 광주지부결성·민주회복국민협의회활동을 해 재야의 매파가 됐다.
그러나 다산연구에 대한 꿈은 결코 버리지 못해 틈틈이 정진,79년 다산이 지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처음으로 국역 출판해 재야 다산연구가로 이름을 냈다.
그러나 80년 광주항쟁후 박 의원은 별다른 「활약」이 없었음에도 또다시 주모자로 몰려 서울·온양 등지로 정신없이 도피하는 생활을 했다. 이 도피기간중 『다산산문선』 『애절양』등 다산저서를 충실히 번역해 훗날 출판했다.
결국 온양에서 불심검문에 걸려 1년3개월여를 복역한뒤 광주시내에 한중고문연구소를 차려 남의 집 족보와 문집을 번역해주며 생계를 이어갔다. 84년 전두환정권의 복권·복직조치로 다시 광주대촌중 교사로 발령을 받았지만 광주구속자협의회,5·18기념사업회 결성과 국민운동본부 광주공동의장을 맡아 어느새 호남재야운동권의 중추가 됐다.
의원으로의 변신은 87년 김대중후보의 대선패배이후 98명의 재야인사가 평민당에 입장한게 계기가 됐다. 광주 전남민주인사 후보추대위에서 의원후보로 추대된 그는 『민주화가 돼야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출사표와 함께 고향 무안에서 무난히 당선됐다.
13대의원에 당선됨과 동시에 박 의원은 그간의 다산연구를 정리한 『다산기행』이라는 첫 저술를 내 비록 강단에 서지는 못했지만 다산학자로 인정받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런 인생역정이 영화 『서편제』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게 했다고 겸연쩍어 했다.
13대 문공위에서는 강삼재·이철의원과 함께 문공위 삼총사로 불리며 교원정보부 추궁,방송광고공사폐지촉구와 언론청문회 등의 활약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지난 임시국회의 교육위에서 대학은사이자 자신과 같은 해직교사 출신의 오병문장관(전 전남대총장)을 상대로 교육부의 비리와 부정을 추궁했다. 물론 오 장관 때의 일은 아니었으나 다소 인간적으로 묘한 느낌도 가졌다고 했다.
이런 박 의원에 대해 동료 의원들은 성격이 다소 급하고 공명심이 앞서기도 한다고 비판적으로 보기도 한다.<최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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