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블레이드 러너」가 전하는 메시지|2019년 지구 복제 판치는 폐허의 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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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2019년 11월 로스앤젤레스.「최종 전쟁」이후의 이 황폐한 대도시에는 끊임없이 산성비가 내린다. 방사능 낙진으로 오염된 지구를 벗어나기 위해 인류 대다수는 우주 식민지로 이민을 떠났고 지구엔 극소수 자본가, 이민을 떠나기엔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하층민들과 부적격자인 돌연변이들만 남아있다. 이 시대의 대기업인 타이렐사는 복제 인간을 만들어 우주개척에 투입하고 있었다. 이들이 만든 최신형 복제인간인「넥서스 6형」은 외형만으로는 인간과 전혀 구분이 안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만든 엔지니어와 맞먹는 지성과 보통 사람을 월등히 능가하는 체력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랑·증오·고통의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무서운 점이다. 그런데 전투용으로 만들어진「넥서스 6형」4명이 우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지구로 잠입한다.「불법」복제 인간을 제거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특수경찰 블레이드 러너였던 데카드는 예전의 상사인 브라이언에게 불려가 다시금 복제인간 추적에 나서게 된다.
암울한 미래 사회의 묘사로 SF영화에 신기원을 마련했다고 평가되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가 처음 개봉된 지 11년만에 국내에서 선보였다. 82년『E·T』와 거의 동시에 개봉됐던 이 영화는 그 비관적인 묘사 탓인지 제작비도 건지지 못하는 참담한 흥행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으나 그 이후 일부 비평가·매니아를 중심으로 꾸준히 평가가 높아진 대표적인 컬트영화다. 지난해에는 감독인 리들리 스콧이 직접 편집한 디렉터스 컷(Director's Cut)』이 개봉돼 화제를 모았다. 과학기술 발전이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기는커녕 지배-복종을 강화하는 질곡이 됨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묵시록적인 미래상은 그 이후 이른바 디스토피아 영화(유토피아의 반대말로 미래사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의미함)가 대량으로 쏟아지는 기반을 마련했다. 80년대 중반이후 등장한『브라질』『로보캅』『플라이』등 테크놀러지에 의한 인간주체의 파괴를 다룬 뛰어난 영화들이 모두『블레이드 러너』로부터의 영향을 암암리에 보여주고 있다.『블레이드 러너』는 그러나 단순히 고통에 찬 미래사회를 제시함으로써 현대인들의 기술 만능적인 오만에 경종을 가한다는 수준의 계몽극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개인의 정체성 위기라는 대단히 진지한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인간보다 더 인간적인」복제인간(레플리컨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 외엔 인간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이 사진 수집에 열광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기억을 갖지 못한 이들은 사진이란 매개를 통해 기억, 즉 자신의 과거를 만들어나간다.
타이렐사가 자랑하는 정교한 복제인간인 레이철과 사랑에 빠진 데카드는 복제인간들에 대해 동정적으로 될 뿐만 아니라 급기야 자신이 복제인간이 아닐까 하는 의문에 빠져들게 된다.
이 영화는 사회학적인 맥락에서 볼 때 자본과 첨단기술의 결합인 현대의 대기업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해된다. 외계에서의 노동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복제인간들은 주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지구로 탈출한다. 특수경찰인 데카드는 타이렐사의 지령으로 그들을「해고」하려 하나(복제인간을 제거하는 것은 처형이 아니다) 그도 서서히 자신이 거대조직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시각적인 화려함도 이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중의 하나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 및 필름느와르의 음울한 조명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부패한 대도시의 도덕적인 황폐감을 절묘하게 시각화한다.<임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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