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과 이창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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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조치훈9단은 5세 때부터 천재로 소문이 난 사람이다. 『명인이 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62년8월1일 6세의 조치훈이 비행기 트랩을 오르며 남긴 맹세다. 과연 조치훈은 18년후인 24세 때 명인타이틀을 쟁취, 일본바둑계의 정상에 올랐다.
그 역사적 현장에서 한국기자들과 즉석회견이 이루어졌는데 조명인의 제일성은 『이제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기쁩니다』였다. 그때 TBC-TV를 통해 해설을 하고 있던(생방송) 필자는 전화로 그 얘기를 듣고 가슴이 뭉클했었다. 조치훈이 18년전의 그 맹세를 잊지 않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조치훈이 세월이 흐른 지금 이창호와 대결하게된 것은 숙명처럼 느껴진다. 「조치훈과 이창호」 두 사람은 MBC-TV 한일 속기왕대결에서 두번 싸워 1승1패를 기록했다. 지난해 첫 만남에서는 이창호가 승리했으나 올해에는 조치훈이 설욕한 것.
그 두판은 친선대국의 성격이 짙지만 곧 이어 마주친 「동양증권배 세계선수권전」의 결승5번 승부는 1억원의 상금이 걸린 큰 승부다. 「1억원」이라면 「하늘의 별」도 딸 수 있는 거액이 아닌가. 여기서 조치훈은 2패를 기록함으로써 막판에 몰린 상태다. 잘 알다시피 크게 우세하던 바둑을 끝내기에서 거듭 역전당한 내용이다. 이창호가 통산 3승1패를 거둔 네판의 대국에 화제가 만발하고 있다.
조치훈은 지난해 속기대국직후 『이겼다고 결코 자만하지 말라. 바둑은 윤회의 승부다. 끝난 그 순간부터 새로운 승부가 시작되는 것이다』고 했으며 올해 설욕하고는 『일본에 유학을 오라』고 했다. 그때마다 이창호는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조치훈은 이창호가 없는 주석에서 『일본에 나 정도의 수준은 10여명이나 있으며 요다(의전기기)정도는 50명이 넘는다』『이창호는 아직 약하다. 그런 이창호가 정상에 올랐으니 조훈현9단의 책임이 크다』『포석은 약한데 끝내기가 강하다는 것은 뭔가 거꾸로 된 느낌이어서 불가사의하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사자인 이창호에게 그런 말이 전해졌을 것은 뻔한 이치다.
이창호가 바둑계에 나온 이래 가장 자존심상한 상대는 다름 아닌 요다8단이다. 과거 「논타이틀 5번 승부」에서 1대3으로 참패했던 치욕을 잊지 못하던 터에 「요다 정도는 50명이 넘는다 운운』에 내심 투지가 불타올랐음직하다. 이창호가 후지쓰배에 불참하면서까지 동양증권배 결승5번 승부에 대비해온 까닭을 짐작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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