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할 땐 외롭지 않아” 음악서 꿈 찾는 소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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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얕은 언덕 위에 있는 부산 소년의 집 5층에서는 바다가 보인다. 부모 없는 아이들이 모여 사는 이곳에서는 몇 달 전부터 베토벤 음악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23일에도 바닷가 햇살에 까맣게 그을린 까까머리 남자 아이들이 바이올린, 비올라 악기별로 무리 지어 하루 7시간씩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다음달 20일 지휘자 정명훈(54)·민(23) 부자와 연주하는 부산 소년의집 오케스트라 단원들이다.

“여기 이 음표들이 있다 아이가. 더 딱딱 끊어서 확실하게 해야 된다.” 오케스트라에서 수석 바이올린 자리에 앉는 심우진(17)군의 목소리가 힘차다. 낡은 바이올린을 옆구리에 낀 아이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자, 96마디부터 다시 해보자.” 심 군은 제1 바이올린 파트를 연습시키는 중요한 역할이다. 보육원 아이들 60명으로 이뤄진 이 오케스트라는 베토벤 5번을 집중 연습하고 있었다. 부산 소년의집은 가톨릭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복지시설이다. 가족이 없는 3~18세의 남자 500여 명이 서로 의지하며 생활한다. 1979년 만들어진 이 오케스트라는 부산의 명물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피아니스트 김대진, 바리톤 최현수가 이들과 한 무대에 섰다.

“처음에는 그냥 미사 반주하라고 만들었는데 얘네들이 자꾸 상을 타오는 거예요.” 오케스트라를 총괄하는 김소피아 수녀가 기특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79년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 현악 부문 우수상부터 시작해 90년 최우수상 등 아이들은 목표한 상을 끝내 따와 소년의 집에 걸었다.

“의지할 데가 없는 아이들이잖아요. 음악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찡하죠.” 김 소피아 수녀가 덧붙였다.

‘정명훈과 함께하는 소년의 집 기금마련 음악회’를 앞두고 소년의 집 학생들이 연습실에서 오케스트라 연습을 하고 있다.[부산=송봉근 기자]

이 오케스트라에서 악기를 처음으로 잡고 음대에 진학, 정식 오케스트라 단원을 직업으로 삼은 학생들도 적지 않단다. 소년의 집 학생들을 교육하는 고등학교는 99년 ‘알로이시오 전자 기계고등학교’로 특성화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졸업 후 공업 분야에서 직업을 찾는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에서 음악의 맛을 안 아이들은 고집스럽게 음대로 진학한다. 더블베이스 수석을 맡고 있는 박재선(17)군은 “부모님 뒷바라지 없이 혼자서 음악을 전공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며 “하지만 음악을 할 때 제일 행복하니까…”라고 말했다.

요즘은 자원봉사를 하는 연주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지만 오케스트라 결성 초기에는 한두 명의 음악 전공자가 오케스트라 전체의 레슨을 맡기도 했다. 이들의 연주 모습은 다음달 20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에서 볼 수 있다. 공연 수익금은 모두 소년의 집에 기부된다.

부산=김호정 기자<wisehj@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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