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장인사 자율화의 조건(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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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시중은행장의 임명이 정부 또는 정치권력의 입김에 좌우되고 은행임직원의 인사조차 바깥바람을 타는 폐습이 청산되지 않고는 금융자율화와 이를 통한 금융산업의 효율화는 아예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은행인사의 독립성이야말로 금융자율화의 핵심이다. 80년대 이래의 금융자율화 노력이 아직 제자리걸음에 머물러 있는 것도 바로 이 핵심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은행장이 경영효율화의 실적쌓기보다 권력에 줄대기를 더 중시하는한 은행과 금융산업의 발전은 백년하청이다.
김영삼대통령은 지난 26일 금융개혁의 첫 단계로 정부가 시중은행장의 인사에 간여하지 말 것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재무부는 시은행장을 전행장 3명,주주대표 4명,고객대표 2명으로 구성된 9인추천위에서 뽑겠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은행인사의 공정성 보장을 위해선 이런 제도도 중요하지만 가장 핵심은 역시 정부의 공정의지다. 금융기관인사의 자율화는 대통령선거당시 경제분야 공약으로 제시된 것이지만 금년 봄의 은행주총에서는 이 공약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금융가에 적지 않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금년의 경우는 은행들의 주총일정이 대부분 새정부 출범직전이었고 은행장선출 방식을 짧은 시일내에 만들기도 어려웠던 만큼 종전방식의 답습을 대체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지만 다음번 주총부터는 반드시 약속을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은행의 인사자율화는 은행경영의 자율화와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는데다 금융제도개편과도 맞물려 있어 현재 추진중인 금융제도개편작업의 테두리내에서 포괄적으로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시중은행경영에 대한 정부개입의 토대를 이뤘던 정책금융·지시금융·구제금융의 축소가 선행돼야만 명실상부한 은행인사의 독립성 보장이 가능해질 것이다.
시중은행이 정부의 산업정책이나 중소기업정책의 집행기관 성격을 짙게 띠고 있는한 그같은 정책기능수행상의 과오나 실적부진이 인사개입의 빌미가 될 공산이 크다.
시중은행의 자율인사 관행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포함한 집권층의 인사개입 자제노력과 아울러 은행의 공공성과 상업성이라는 두가지 성격에 대한 민관의 인식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은행은 어려움에 빠진 기업이나 개인에게 자금을 대주는 공익기관이기 전에 금융시장의 치열한 경쟁을 헤쳐나가는 금융기업인 것이다. 시중은행의 상업성을 강조하는 금융제도개편에 따라 지금까지 떠맡아온 공익기능의 대부분은 특수은행과 재정부문으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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