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별 살해 - 선별 석방 … 남은 사람 운명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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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일부 인질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평소 정기적으로 약을 복용해 온 것으로 알려진 김지나(왼쪽 동그라미부터)·유경식·이영경·배형규씨 가족들은 애를 태우고 있다.

탈레반 반군에 납치된 23명의 한국인 인질 가운데 8명이 풀려난 것으로 전해졌다. 납치 세력은 인질 한 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아직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사실일 수도 있고 한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협상용일 수도 있다. 또 다른 관심사는 남은 인질들의 운명이다. 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 물꼬는 텄으나 쉽지는 않다=일단 8명이라도 풀려난 것으로 알려진 것은 좋은 징조로 읽힌다. 협상의 셈법이 나온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조건을 내걸었던 납치세력은 수감 중인 동료와 같은 수의 인질을 맞교환하고 일정 액수의 몸값을 챙기는 데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도 비슷한 조건을 내걸 공산이 크다. 아프간 정부가 협조하고 한국이 몸값을 부담할 경우 나머지 인질들 모두가 무사히 석방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렇다고 모든 게 수월한 것만은 아니다. 당장 아프간 정부가 남은 인질과 같은 수의 탈레반 죄수를 풀어주게 되면 테러단체에 굴복했다는 국제적 비난이 높아질 것이다.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은 3월 이탈리아 기자 납치 사건 때 탈레반 수감자 5명과 인질을 맞교환했다 곤경에 처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또다시 한국 인질 석방을 위해 테러범에 양보한 것으로 알려짐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 불신을 사게 됐다. '테러범과의 협상은 없다'는 아프간 정부의 원칙이 크게 흔들린 것이다. 카르자이 대통령이 국내외적으로 부담을 질 수밖에 없게 됐다. 한국이 납치 단체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아프간 정부를 계속 설득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몸값 지급문제도 간단치가 않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는 지난해 5월까지 이라크에서 납치된 9명의 인질 석방 대가로 모두 4500만 달러(약 410억원)를 지불했다. 인질 한 명당 최소 250만 달러에서 최고 1000만 달러를 냈다. 탈레반 무장세력도 비슷한 액수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정부가 받아들이기에 결코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 고도의 심리전 펴는 탈레반=인질 일부 석방으로 심리적 부담을 덜게 된 납치세력은 남은 인질들을 붙잡고 지루한 협상을 벌이려 할 것이다. 남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풀어주기보다 몇 명씩 나누어 순차적으로 석방하며 최대한의 대가를 받아내려 할 것이다. 협상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 살해 협박도 계속할 것이다. 협상이 복잡하고 장기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탈레반은 4월 3일 프랑스 구호단체 직원 두 명을 납치한 뒤 여자는 26일 만에 풀어주고, 남자는 프랑스군의 철군을 요구하는 협상용으로 남겨뒀다 39일 만에 풀어준 적이 있다.

납치세력은 25일 한국인 인질 8명을 선별 석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도 여러 장의 카드를 꺼내들고 교란 전술을 폈다. 같은 상황에서 상반되는 정보를 흘리는가 하면 한 말을 금세 뒤집기도 했다. 요구 사항도 계속 바뀌었다. '아프간 주둔 한국군 즉각 철수'에서 '인질과 동수의 동료 수감자 석방'으로 요구조건을 바꿔 내걸었다. 모두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장악하기 위한 전술로 보인다. 아프간 정부 협상단을 이끌고 있는 와히둘라 무자다디는 "이번 사태가 쉽게 타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탈레반이 요구조건을 계속 바꾸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탈레반의 지휘체계가 복잡하고 체계적이지 않은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납치단체 내부에 석방 조건을 두고 분쟁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무장세력 중 일부가 지도부의 석방 결정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극단 행동에 나설 수도 있다.

유철종.원낙연 기자

◆ 탈레반=1994년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에서 수니파 이슬람 원리주의 학생들이 중심이 돼 결성한 강경 수니파 무장 정치세력이다. 탈레반이라는 단어 자체가 '학생'이라는 뜻이다. 물라 모하마드 오마르가 이끄는 탈레반 세력은 96년 가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했고, 2001년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 공격 이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했다. 2001년 9.11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를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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