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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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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3일 심형래 감독의 ‘디 워(D-WAR)’ 시사회에 다녀왔다. 역대 한국영화 가운데 최고의 스펙터클을 구현한 ‘디 워’(제작비 300억원)를 보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2002년)에 나오는 한 대사가 갑작스레 떠올랐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Can you Speak English)?”

 현대인의 속물 근성을 잘근잘근 씹어온 홍 감독은 영화에 이 영어 구절을 끼워 넣었다. 유부녀 선영(추상미)에게 집적대던 무명배우 경수(김상경)가 선영의 남편과 마주치자 엉겁결에 내뱉은 말이다. 객석에선 폭소가 터졌다. 영어 콤플렉스라는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을 절묘하게 건드렸다.

 ‘디 워’는 한국영화로는 드물게 대사 대부분이 영어다. 미국시장 본격 진출을 노린 심 감독의 전략이다. 한국(8월 1일)에 이어 미국(9월 14일)에도 선보이는 ‘디 워’는 이미 미국에서 1700개의 스크린을 확보했다. 두말할 것 없이 ‘파천황(破天荒)’의 기록이다. 주연배우도 할리우드에서 캐스팅했다. 처음부터 한국보다 미국을 겨냥했다. 한국발 할리우드행 ‘특급열차 1호’인 셈이다. 올 겨울 일본에서도 500여 스크린을 예약한 상태다.

 ‘디 워’의 독창성은 한국적 콘텐트에 있다. 우리의 민간전설인 이무기를 소재로 했다. 서양엔 낯선 이무기로 한국문화를 알리겠다는 의도다. 심 감독은 “용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이무기는 우리만의 콘텐트다”라고 단언했다. 그가 빚어낸 영상은 현란했다. 영화 막바지 선한 이무기와 악한 이무기가 서로 몸을 칭칭 감으며 사투를 벌이는 모습은 꽤 역동적이었다.

 심 감독 고백 그대로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가 영어권 관객을 사로잡을 만했다. 김홍도의 정겨운 풍속화, 오케스트라 연주로 장엄하게 흐르는 ‘아리랑’ 등 한국적 요소에 대한 감독의 애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무기가 습격하는 로스앤젤레스의 동물원이 ‘심씨네 동물원’이란 대목에선 유머가 넘쳤다.

 하지만 ‘디 워’에는 영어 콤플렉스가 숨겨져 있었다. 소재만 한국적일 뿐 영상은 전혀 한국적이지 않았다. 악한 이무기가 이끄는 ‘악의 군단’은 할리우드 문법 그대로였다.

‘반지의 제왕’ ‘스타 워즈’ 등에 나타난 대규모 전투신을 그럴듯하게 따라갔을 뿐이다. “미국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고,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영화를 위한 선택”이라는 감독의 말에 일부 동의하지만 할리우드의 아류라는 비판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충분했다.

 특히 심 감독의 대명사인 ‘영구’스러운 이야기 전개와 장면 연결은 전혀 한국적이지도, 미국적이지도 않았다. “우리도 이런 영화를 할 수 있단 말이야”라는 감독 자신의 염원이 지나친 나머지 작품 자체가 국적 불명의 미아(迷兒)로 떨어진 모양새였다.

 사실 이무기는 한국만의 전설이 아니다. 중국에도 이무기가 있다. 이무기는 ‘2인자’를 암시한다. 예전 중국에선 망포()라고 하여 국가에 공을 세운 관리에게 이무기 문양이 들어간 옷을 입게 했다.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용 무늬는 황제의 전유물이었다.

  심 감독은 2인자 이무기로 1인자 용이 되려고 했다. 그는 실제 영화 끝에 삽입한 비장한 자막 코멘트에서 “세계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또 그의 커다란 얼굴 왼쪽 멀리에 ‘Hollywood’ 아홉 글자가 세워진 언덕을 보여 줬다. 혹시라도 최고에 대한, 할리우드에 대한 강박관념은 아닌지. 최근 세상을 들쑤신 신정아씨 사건의 뒤에 깔린 영어(예일대) 콤플렉스마저 연상됐다. 공교롭게도 심 감독은 25일, 고려대 식품공학과 졸업 여부를 놓고 논란에 휩싸였다. ‘디 워’가 미국에서 크게 성공해 기자의 소견이 단견으로 드러나길 바랄 뿐이다.

박정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