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월요인터뷰

“한국 대학은 건물에…미국 대학은 교수에 투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만난 사람=박방주 과학전문기자

가천의대의 조장희(71·사진) 뇌과학연구소장은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과학의 심장부인 유럽과 미국에서 반세기 가까이 살면서 세계 정상에 올라선 몇 안 되는 한국인 과학자다. 칠순을 넘긴 지금도 ‘연구실의 현역’이다. 남이 하지 못하는 최첨단 기법으로 ‘뇌 영상 탐험’에 도전하는 그가 본지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란을 통해 삶의 역정과 열정을 털어놓는다. 조 박사는 회고록 연재를 앞두고 마련한 인터뷰에서 “한국의 이공계 대학이 살길은 똑똑한 학생 못지않게 똑똑한 학자를 확보하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평소에 한국 대학의 현실이 참으로 한심하다는 말씀을 많이 했는데.

 “대학과 정부가 학생 뽑는 데만 골몰하는 걸 두고 한 말입니다. 대학은 학문하는 곳이므로 당연히 훌륭한 학자가 있어야지요. 훌륭한 학자를 초빙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지 머리 좋은 학생 한둘 더 끌어가겠다고 싸워야 되겠습니까. 세계 10위를 넘보는 경제대국인 대한민국에 세계 100위권 안에 드는 대학이 없습니다. 대학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겁니다.”
 -구체적으로 미국과 한국 대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미국 유수의 대학들은 평상시에도 그렇지만 거액의 기부금이 생길 경우 세계 정상급 교수를 영입하는 데 총력을 기울입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대학들이 기부금을 받아 건물 짓는 데 쓰는 것과는 크게 대비되지요. 기부금으로 세계적 ‘스타 교수’를 영입했다는 말은 잘 들어보지 못했어요. 훌륭한 교수 없이 세계 정상급 대학이 될 수 없습니다. 컬럼비아 대학에 제가 43세 때 정교수로 스카우트됐어요. 그곳에선 조교수-부교수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은 정교수가 많았지요. 실적이 탁월한 교수를 정교수로 영입하는 겁니다. 그 대학의 부교수가 정교수로 승진하는 예는 매우 적습니다. 우리나라는 전임강사로 발을 들여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정교수가 되는 경우가 아직 일반적입니다. 어느 대학 경영자가 ‘우리는 조교수만 뽑는 게 전통’이라고 자랑스레 말하는 걸 듣고 기가 막힌 적이 있어요. 미국의 명문대와는 정반대 정책을 쓰고 있는 것이지요. 미국이나 유럽의 대학에서 치열하게 경쟁해 본 기간이 적은 신참 학자들을 모아놓고 세계 일류니 정상이니 꿈꾸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교수의 질이 결정적이라는 말씀이네요.

 “그렇습니다. 대학은 연구하는 곳입니다. 학생도 중요하지만 우수한 교수가 먼저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뛰어난 스승 밑에 될성부른 제자가 몰리고 우수한 인재가 배출됩니다. 세계 정상급 교수 없이 세계 정상급 대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미 하버드대에 가서 같은 학문 분야의 교수한테 서울의 아무개 대학 아무개 교수 아느냐고 물어보면 “그럼요, 잘 알지요”라는 답변을 듣는 그런 학자가 많아져야 합니다. 불행히도 한국의 대학에는 그런 사람이 무척 적어요.”

 -아카데미즘과 국가 경쟁력은 어떤 식으로 관련이 있을까요.

 “대학 경쟁력은 그 나라의 경쟁력과 관련이 밀접합니다. 국가의 비상 사태나 중차대한 현안이 있을 때마다 대학이 문제 해결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곤 합니다. 경제·과학·문화·예술·국방 전 분야가 그렇지요. 우수한 대학과 교수들이 있으면 좋은 해법이 나오지만 그렇지 않으면 참신한 답을 찾기가 힘듭니다.”

 -교수들의 해외 경험이 그토록 중요하나요.

 “대개 사고의 폭은 자신이 보고 경험한 테두리 안에서 형성됩니다. 세상을 보는 시야지요. 미국의 자그마한 대학에서 조교수 급으로 재직하다 한국에 왔다면 그 사람은 그 수준에서 자신 주변 사물을 판단하고 평가할 겁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대학이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외국의 명문 대학 연구 경험이 무척 요긴할 거예요. 넓은 시야를 가진 인재를 교원으로 뽑아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본받을 만한 해외 사례가 있다면.

 “1850년 일본 메이지(明治) 왕이 도쿄 대학을 설립할 때의 일입니다. 정치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인 교수를 대거 영입했지요. 대학의 의미와 역할·위상을 세우려는 혁명적인 조치였어요. 우리나라는 일제가 패망해 나간 뒤 서울대에 건물과 학생밖에 남아 있지 않았어요. 그때 세계적인 학자를 영입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늦었지만 메이지 왕의 전례를 한번 시도해봄 직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공계에는 우수한 대학원생이 안 들어 온다고 난리입니다.

 “여러 요인이 얽힌 복잡한 문제이긴 합니다. 그러나 우수한 대학과 교수가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라고 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계산에 밝아요. ‘내가 과연 어느 대학 어느 교수 밑에서 박사 학위를 따면 세계에 나가서 큰소리를 칠 수 있겠나’를 따져 봅니다. 당연히 그게 맞고요. 그럴 때 미국이나 유럽·일본 쪽이 국내에 남는 것보다 이득이 되기 때문에 떠나는 겁니다. 가는 사람 어떻게 막겠습니까. 그래서 좋은 대학, 좋은 교수가 필요한 겁니다. 일본만 해도 우수한 학생들이 자국 대학에 많이 진학합니다. 도쿄 대학 같은 세계 100위권 대학이 꽤 많거든요.”

 -대학원생이 외국에 가서 선진 문물을 배워오는 이점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이점이 있지만 인재 유출의 폐해가 더 크다고 봐요. 우리가 선진국과 학문적으로 싸울 힘의 원천은 대학 교수와 대학원생에게 있습니다. 인텔이나 마이크로소프트는 하버드와 MIT 같은 대학과 공동연구를 합니다. 한국 출신의 우수한 대학원생들이 이런 미국 대학 연구실에서 밤새워 연구하면 결국 미국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결과 아닌가요. 한국에는 그런 대학원생이 없으니 연구력이 자꾸 떨어져요. 그러면 국가 경쟁력도 떨어지지요. 만약 미 학술원 회원급의 석학 100명 정도만 서울대 같은 데 모셔와 봐요. 대학원생들이 요즘처럼 해외로 빠져 나가지 않을 겁니다. KAIST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로플린을 총장으로 영입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지요. 그런 유능한 과학자는 총장이 아니라 교수로 영입했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교포 학자들도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애국심 운운해봐야 소용없어요. 대학 총장보다 서너 배 더 많은 연봉을 주고 모셔와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대학 사회를 비롯해 여러 분야에서 국적 문제를 많이 따집니다.

 “국가 안보에 관련된 분야는 당연히 국적을 따져야지요. 그러나 학문은 국적이 다양할수록 좋다고 봅니다. 국제적인 인적 네트워크가 특히 중요한 게 학문의 세계지요. 외국의 프로젝트를 따오거나 전문가들끼리 연결해 공동연구를 하려고 할 때도 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 편한 점이 많습니다. 외국 국적을 가졌다고 손가락질하거나 국적 정리를 요구할 게 아닙니다. 제가 외국 국적자라서 그들을 옹호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대한민국 국적입니다.”
 -많은 대학이 총장을 선거로 뽑는 걸 어떻게 보십니까.

 “미국의 명문대는 총장을 선거로 뽑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세계적인 연구 업적이나 행정 경험을 지닌 인물을 영입하거나 내부에서 임명합니다. 행정 경험보다는 학문적 업적을 더 많이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국내 최고학부인 서울대 같은 곳에서 총장을 선거로 뽑는다는 건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상식 밖의 일이라고 봅니다. 인기에 좌우되지 않으면서 대학을 대표하고 대학을 발전시킬 사람을 찾아 모시는 자리가 총장직이어야 합니다. 선진국 치고 세계 정상급 대학이 없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대학 치고 총장을 선거로 뽑는 곳이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글=박방주 기자 <bpark@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조장희 박사는…
PET 세계 첫 개발
유력한 노벨상 후보

 조장희(인천 가천의대 석학교수 겸 뇌과학연구소장) 박사는 병원에서 진단용으로 널리 쓰이는 컴퓨터 단층촬영(CT), 자기공명 단층촬영(MRI), 양전자 방출 단층촬영(PET) 세 가지 첨단 장비를 손수 개발해 낸 세계 유일의 과학자다. 그중에서도 PET는 세계 최초로 독자 개발했다. PET는 암 진단과 치료, 기초과학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노벨상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돼 왔다. 조 박사와 별도로 CT와 MRI 개발에 성공한 과학자들은 이미 노벨상을 받았다.

 조 박사는 전용 연구동이 배정된 국내 유일의 교수다. 연봉 30만 달러(약 2억7500만원)를 83세까지 받기로 2004년 가천의대와 계약해 국내 교수 중 최고 연봉자이기도 하다. 좌고우면하지 않는 그의 단호한 언행은 종종 화제를 불러 일으키곤 했다.

최근 현직 부총리가 이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가 그런 사례. 이길여 가천의대 회장 등이 연구소 1층부터 영접에 나섰으나 정작 소장인 조 박사는 2층 연구실에서 논문을 읽고 있었다. 이런 행동은 이 회장이 연구소를 순시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연구 이외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의 경조사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그의 달력에는 휴일이 없다.

본지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에 글을 써 달라고 청탁했을 때 “아직 할 일이 너무 많다”며 여러 차례 고사했다. 구술하면 본지 기자가 받아 적어 정리하는 조건으로 마침내 응했다. 그는 요즘 MRI와 PET의 영상을 결합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여태껏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일이다.

 ◆조장희 박사 ▶황해도 연백군 금산면 출생(1936년) ▶서울 남산초등학교 졸업 ▶서울사대부중·고 졸업 ▶서울대 전자공학과(60년) ▶스웨덴 웁살라대 전자물리학 박사(66년) ▶스웨덴 스톡홀름대 조교수 및 부교수(71~75년) ▶미국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부교수(72~78년) ▶미국 컬럼비아대 정교수(79~85년) ▶한국과학기술원 교수(78~97년) ▶미국 학술원 회원(97~현재) ▶미국 캘리포니아대 어바인 캠퍼스(UCI) 교수(85~2006년) ▶가천의대 석학교수 겸 뇌과학연구소장(2004년~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