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성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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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요즘 일본 바둑계는 고바야시 고이치(소림광일)9단의 토출용궁(토출용궁)이 가장 큰 화제거리다. 일본 최대의 기전인 기성전 결승 7번 승부에서 도전자 가토 마사오(가등정부)9단에게 일찌감치 막판에 몰렸다가 기사회생했기 때문이다.
도전자 가토는 제1,2국을 이겨 기세를 올린 후 제3국을 내주었으나 제4국에서 승리함으로써 3승1패로 타이틀을 쥔 고바야시를「막판」에 몰아넣었다. 그래서 모두들『이번이야말로 고바야시가 무너지겠구나』라고 생각했었다. 마침 가토가 19연승을 거두는 등 전성기 때를 능가하는 좋은 컨디선이었으므로 더욱 가능성이 커 보이는 분위기였다.
가토는「킬러」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직선적 성품에 화끈한 내용의 바둑을 즐겨 두는 편이다. 따라서 단기전에 능한 반면 장기전엔 약한 면이 있다. 끈기가 다소 부족하다고나 할까. 결승 5번 승부나 7번 승부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승리한 예는 많아도 막판에 몰린 상황에서 뒤집기에 성공한 예가 거의 없다는 점이 그 증거다.
지난번 조치훈9단이 고바야시에게 3패 후 4연승으로 본인방타이틀을 지켰을 때 가토는『정말 대단하다. 조치훈이야말로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졌다』고 감탄했으며 이번 기성전에서도 은연중 속전속결을 다짐했다. 가토가 3승1패로 고바야시를「막판」에 몰아 넣었을때만 해도 그것은 실현되는 듯했다.
가토는 과거 명인·본인방·십단·천원·왕좌 등 큰 타이틀을 두루 섭렵한 일본 프로바둑계의 거목이다. 그가 이번에 기성타이틀만 수중에 넣었더라면 이른바 그랜드슬램을 이룩했을 것이다. 일본 프로바둑계에서 그랜드슬램의 대기록을 가진 사람은 조치훈뿐이다.
고바야시가 본인방타이틀을 획득하고 싶어 애간장을 태우듯 가토는 기리 타이틀에 한이 맺힌 인물이다.
바로 그 점이 패인으로 작용한 인상이다. 가토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다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상대를 막판에 몰아넣은 다음부터 빨리 끝내려고 서두르다가 다 이겼던 바둑을 거듭 놓쳐 3승3패 동률을 허용했던 것. 이런 경우 기가 꺾여 제7국 역시 이기기 어려운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토는 5억원짜리(상금+다음 기결승 확보+대국료가 달라짐+각종행사때 상석에 앉음 등을 감안) 단판승부인 제7국에서 맥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고바야시는 야마시로 히로시(산성굉)9단의 도전을 받았을 때도 1승3패의 상황에서 극적으로 지옥을 탈출했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과정을 밟았다.
이로써 고바야시는 조치훈이 불의의 교통사고때 빼앗은 기성타이틀을 8기 연속 지키는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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