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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의펜화기행] 정문이 된 동쪽 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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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대한문, 종이에 먹펜, 36X 50cm, 2007

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光化門)이고, 창덕궁은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은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은 흥화문(興化門)이다. 모두 화(化)자 돌림인데 유독 덕수궁의 정문만 대한문(大漢門)인 이유가 뭘까.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잿더미가 된 한양에 돌아온 선조는 정릉동에 있는 월산대군 사저를 행궁 삼아 16년을 살다 승하했다. 뒤를 이은 광해군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이라 이름 짓고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췄지만 광해군 7년(1615)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경운궁이 활기를 되찾은 것은 을미사변으로 왕후를 잃은 고종이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다. 이때 궁 남쪽에 정문인 인화문(仁化門)을 세웠으나 사용하기 불편해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이 정문 역할을 했다.

 

현재의 대한문

고종 43년(1906) 대안문의 이름을 대한문으로 고쳤다. 매천야록에는 류시민이 류운룡(류성룡의 형)의 무덤에서 나온 비결이라며 고종에게 바친 서찰에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고 도읍을 안동 신양면으로 옮기면 나라 운수가 번영하리라”는 내용이 있어 개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으로는 대안문의 안(安)자가 여인(女)이 갓을 쓴 모양인데, 실제 모자를 쓴 여인들이 경운궁을 드나들면서 나라를 망쳐먹고 있어 바꿨다는 속설이 널리 퍼졌다. 러시아 베베르 공사 부인과 그 언니인 손탁 부인이 서양 모자를 쓰고 드나들며 고종과 엄비의 환심을 샀고, 이토 히로부미의 첩인 배정자 또한 양장에 서양 모자를 쓰고 드나들며 밀정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1968년 태평로를 확장하며 덕수궁 담장을 뒤로 물릴 때 대한문만 길에 따로 남아 있다가 70년 비로소 뒤로 옮겨졌다. 지금에 와선 문 앞의 월대는 흔적조차 없고 계단 소맷돌인 돌짐승 한 쌍만 남아 문을 지키고 있다.

김영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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