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의 대한문, 종이에 먹펜, 36X 50cm, 2007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잿더미가 된 한양에 돌아온 선조는 정릉동에 있는 월산대군 사저를 행궁 삼아 16년을 살다 승하했다. 뒤를 이은 광해군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이라 이름 짓고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췄지만 광해군 7년(1615)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경운궁이 활기를 되찾은 것은 을미사변으로 왕후를 잃은 고종이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다. 이때 궁 남쪽에 정문인 인화문(仁化門)을 세웠으나 사용하기 불편해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이 정문 역할을 했다.
현재의 대한문
1968년 태평로를 확장하며 덕수궁 담장을 뒤로 물릴 때 대한문만 길에 따로 남아 있다가 70년 비로소 뒤로 옮겨졌다. 지금에 와선 문 앞의 월대는 흔적조차 없고 계단 소맷돌인 돌짐승 한 쌍만 남아 문을 지키고 있다.
김영택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