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전쟁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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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전쟁의 밤은 슬프다.
적들은 퇴주를 거듭해 전선은 새도선에 걸쳐 지루한약보합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중국이 중재에 나서 휴전 협정이 곧 조인되리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야간 공습이었던 다음 날이면 여자들의 화장은 더욱 요염해졌다. 창백하도록 하얀 분칠을 하고는 그 위에 선홍색 루즈를 발랐으며 남자들은 사탕보다 더 맛나게 그것을 빨았다. 전쟁이 쉬 끝나 주리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었다. 쾌락은 가까웠으며 평화는 멀었다.
부상병을 가득 실은 차량이 후방을 향해 줄을 잇고, 앙갚음이라도 하듯 아직 발랄하고 철모르는 재수생과 오렌지족 복장의 총각들이 의용대에 합류하여 거리를 힘차게 행군해도 울거나 슬픈 표정을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래는 그만큼 멀리 있었고 흔해져버린 구호물자와 헐값에 들어오는 수입식품 탓에 매점매석에서 풀려난 쌀· 고기· 술이 슬픈 창녀보다 헤프게 유통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전선이 북으로 밀려나면서 문을 열기 시작한 단란주점의 네온사인은 절망보다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내란의 밤은 몹시도 자주 찾아온다는 그 엄청난 사실에만 사람들은 진저리를 치곤 했다. 『야 임마, 함기자야. 니도 임마 기자냐. 전쟁이 일어났을 때를 가정해 가상 기사 하나 써오라캤드니 일마가 마 여기가 베트남인 줄 아나. 니 왜「머나먼 쏭바강」소설을 쓰고 자빠졌노』
데스크 박부장은 함기자를 나무라고 있었지만 함기자의 기사가 그다지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어차피 가상인데 그도 그럴 법하다고 여긴 것이리라.
북한이 NPT를 탈퇴하고후세인 못잖은 하룻강아지식 전의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자 전쟁 가능성은 없다고 정부는 변명했지만 언론의 자유가있는 이상 월간지마저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다.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핀잔을 들을지언정 전쟁가능성에 대한 기획을 해야만 했다. 사실 직장인과 다수 지식인들의 술렁거림, 그리고 그에 대한상업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기획이었다.
함만수 기자의 1년 후배인 양병일만 해도전쟁 콤플렉스가 분명해 보였다. 아니 분명해 보인 정도가 아니라 그만하면 중증이라해도 무방했다,
『형,이거 어떻게 되는 거지? 북한이 NPT를 탈퇴하겠다면 이미 핵무기를 개발했거나 막바지에 와 있다는 거 아냐. 형이 언론사에 있으니까 무슨 소식이 들리면 즉각 내게 좀 알려줘』
북의 폭탄선언이 언론에 보도된 직후 만수에게 걸려온 병일의 전화였다. 그 무렵만 해도 북한의 NPT탈퇴 선언과 미국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는 국민 누구에게나 큰 충격을 주었으므로 병일의 호들갑이 유난스럽다고 느끼지는 못했던 터였다, 그 갑작스런 사대 진전으로 인해 장미 빛 남북교류시대를 꿈꾸던 정부도 놀라고 언론도 경악한 바가 없잖았으니 보통 사람들이 공포를 갖지 않는다면 그도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 었다,
벌집을 쑤시기라도 한듯 혼란스레 허둥대던 정부는 이례적으로 전쟁 징후가 전혀 없다는 북한의 동태 분석결과를 단호한 어조로 천명하고 언론도 재빨리 동의하자 많은 사람들은 다시금 주식 시장을 정상화 시키는등 생업으로 돌아 갔지만 나름대로 국제 역학과 정치 문제를 분석할 자신이 있다는 사람들은 옛 중국의 기나라 사람들처럼 심각한 우려를 떨리는 가슴속에 넣고 살지 않을 수없었다. 그들은 결코 기우가 아니라고 믿었다.
『만수 형, 술 한잔 살테니 나오슈. 나 어제 갖고 있던 주식몽땅 팔았수. 앞으로 더 떨어지기 전에 팔아치우는게 상책아니겠수. 근데 말요. 유엔 안보리가 이 문제에 개입하면 어찌되는거요? 형, 문제가 심각하지 않수. 경제 제재, 무역로봉쇄, 다음엔 뭐요? 무력 응징 아니우. 완전 이라크 꼴이잖소』
두번째 전화에서 병일은 주식을 팔았다고 했다. 제 나름대로 철저한 정황분석이 없었다면 결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내 보기엔 상태가 그려 삼엄한데 왜 정부와 언론은 이렇다 할 말이없는 거죠. 팀스피리트 훈련이끝나면 NPT탈퇴 방침을 철회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는데 당최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잖아요. 여기 여행사에 있으면 가끔 북한을 다녀온 바이어들을 만나곤 하는데 그들 말을 들으니 북쪽 사람들 기색이 심상치 않다고들 합디다. 옥쇄도 불사하겠다는 분위기라는 거죠. 근데 왜 우리정부나 언론은 점점더 축소 발표만을 일삼느냐는거예요. 신정부의 개혁 정책과 그건 별개 아니우』
함만수는 병일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정부 내의 북한 분석가들은 믿는 게 많았다. 그들은 우선남한에 주둔한 미군을 믿었다. 멀리 떨어진 남의 나라 곳곳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의 태도에 문제가 없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미국의 강성한 의지력과 협정된 조약에 의거한 전쟁 발발시의 철두철미한 지원 계획을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을 치르기에는 너무도 허약한 북한의 경제 상황을 믿었다. 아울러 위에서부터 아래까지「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시도 때도 없이 외쳐대는 북쪽 사람들의 통일 의지를 믿었고, 따라서 새로 들어선 남쪽 문민정부의 개혁과 통일 정책을 북쪽이 몹시 반기며 그 반가움은 전쟁과는 정반대인 새로이 물오른 민족주의로 승화되리라 믿었다. 『이거 아무래도 불안해서 말이우. 우리 회사에서 이번에 LA지점을 신설하는데 거기 근무를 자원이라도 해야할 것 같아요. 요즘 신문 보니까 북한의 움직임이 영 심상치가 않아서요』
병일은 여행사에 다니고 있었다. 전화로는 릅족하지 않아 끝내는 잡지사까지 와서 만수를 불러냈다. 잡지사 근처 생맥주 집에서 병일은 LA지점으로 피신할 수도 있다는 말을 꺼냈고 그것은 허언이 아닌 듯했다.
최근 보도를 보니까. 옛날 같으면 대서특필도 부족하겠지만 한 귀퉁이 조그맣게 단신으로 취급되었는데 북한이 이란으로부터 일본까지 겨냥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 공장을 세우도록 달러를 지원받는 대신 이란이 핵무기 공장을 세울 수 있도록 기술 지원을 하기로 했다는 거예요』
병일은 극심한 갈증탓인지 생맥주 5백cc짜리를 단숨에 두개나 비워버렸다.
그 소식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북한이 베를린의 암시장에서 금수 품목인 미사일 발사램프 조립에 필요한 고가의 특수 금속을 밀수입했다고 그래요 이 때문에 미국· 독일· 러시아의 정보원들이 법석을 떨고 있다는데 말이우. 그리고 최근 북한의 학생들과 제대 군인들이 대거 군복무 신청을 하고 있다는데 이러한 일련의 징표들을 형은 뭐라고 생각해요?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 정부는 북의 그러한 징후들을 모두「제스처」로만 치부하고 잘 될 거라는 낙관만 하고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형.』
듣고만 있던 함만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글쎄, 나는 우선 북한의 의도에 대해 세심한 관찰을 해야 한다고 보는데. 다시 말해 북한이 남한 신정부의 개혁의지를 과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말이지. 요즘 들어선 북한이 진정으로 선호하는 남한의 파트너는 군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말이야. 그네들 세습독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북 냉전이 필요하고, 그러기에는 군부가 안성맞춤이라는 거치. 지난 선거에서 휠씬 더 개혁성향인 민주당 낙선에 일조를 한 이선실의 경우만 해도 그래. 민주당 낙선을 위해 이선실의 암약상을 고의로 노출시킨 게 아니냐는 거야. 기존보수파를 당선시켜 놓았더니 신정부 하는 꼴이 영 그들이 의도했던 바가 아니거든. 과거지사 때문에 장관들이 바뀌고 삼부 요인들의 재산이 공개되고, 일련의 정책들이 인기 전술이건 개혁 드라마이건 어느 정도 흐트러진 민족정기를 잡아가고, 대북 유화 제스처가 뒤를 이으리라는 건 안봐도 뻔한거거든. 남한이 그런 식이라면북도 보조를 맞춰야 하는데 북의 경우는 가장 핵심인 정권세습이 뜨억 버티고 있으니 말이 안되겠거든. 경제라도 회생시켜 볼까 하고 꾸준히 미국 앞에서 계명구도 작전을 펴 봤지만 들어먹질 않고. 그래서 NPT탈퇴 표명으로 배수진을 친것일 수도 있어. 깽판 작전이지』
만수의 분석은 궤변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병일에겐 금과옥조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좋아요. 형 말이 맞다고 칩시다. 이 땅에 과연 전쟁은 일어나는 거요, 아니오? 북한에서는 IAEA 가입국들이 제재조치를 가할 경우「섬멸적인보복타결」을 하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대상은 남한이 될확률이 높구만요? 도대체 미국은 북한을 개방으로 끌고 갈의지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작금의 각본대로라면 북한이 이라크 꼴 되기가 십상일 것 같은데 내 판단이 틀립니까? 형이 제발 아니라고 좀 해줘요. 나도 비겹하게 조국을 떠나 있기는 싫단 말예요.』
함만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니라고 말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수에게 병일의 해외도피를 말릴 만한 말재간은 준비돼 있지 않았다.
『요컨데 한국에서의 전쟁 발발 가능성은 오로지 미국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보면 될 거야, 미국은 사사건건 물고 늘어져 북한을 궁지에 몰아넣었어. 북한의 NPT탈퇴는 그래서 나온 거지.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에 덤비겠다고 나올 수 있는 거야. 남한도 미국의 의도가 걱정되기 때문에 안보리 가동을 찬성치 않겠다고 한거야. 북한을 설득하고 미국에 사정해보겠다는 거지』
함만수도 맥주 5백cc들 단숨에 마셔버렸다. 목을 축인 만수는 제자에게 비장된 구결이라도 전하는 품으로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북한의 목을 조르는 미국의 의도는 무엇일까. 전쟁? 왜? 아라비아 전쟁때처럼 구식 무기를 소비할 속셈? 그것으로는 이유가 불 충분해. 그래, 북한의 목을 조르면 북한은 남한에「섬멸적인 보복타격」을 시작할 거야. 이렇게 되면 한미 양군은 작전대로 공격을 개시할거고, 북한으로서는 중과부적이지. 전선은 금세 평양 근처까지 올라갈 거야. 중국은 북한에 항복을 설득 종용하겠지. 북한도 마지못해 그러는 체 할거고. 그런데 북한에는 소수이긴 해도 핵무기와 스커드 미사일이 있었어.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가 있다는건 7O년대부터 감지 되었었어. 미국은 진작에 북에 핵무기가 개발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전쟁은 막바지에 다다른듯 했어. 북은 항복을 해야만 했고. 오래 신봉해 온 사회주의 깃발은 내려지고 김일성 부자와 친위세력은 전범으로 군사재판을 받아야 해. 너라면 이 때 어떡하겠어? 휴전을 앞두고 잠잠할 무렵, 중국 동족의 공해상에 잠수함이 떠오르고 수발의 스커드 미사일이 남한을 향해 발사돼.
핵탄두가 장착돼 있었지. 그중 및 발은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의해 요격되지. 그리고 몇발은 서울과 대구· 부산등에 떨어져 버섯구름이 되어 오르고 한반도에는 죽음의 재가 뒤덮여』
병일은 꼴깍 침을 삼켰다.『그렇죠. 핵 전쟁 가능성이 있다는 거군요!』
『거기까지 오면 미국의 의도는 완성 했다고 볼 수 있어. 핵문제에 관한 한 인류에의 경고! 히로시마의 비극은 시간적으로 너무 멀어. 핵확산을 막겠다는 미국의 의지는, 한반도에서 매우 불행한 오시범을 보임으로써 일단 성공을 거두는 셈이야.
더욱 비극적인 것은 황무지가 된 한반도의 남과 북에 재건을 하겠답시고 미국과 일본이 공평히 진주하는 거야』병일은 다시금 맥주 하나를 더시켰다.
『그럼 이 땅에 그 비극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겁니까. 내가 그럼 잘 생각한 거군요?』
『방법이야 있지』
『뭐라구요? 그게 뭡니까?』만수는 지긋이 범일을 주시했다.『네가 LA로 도피하지 않는거야』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어안이 벙벙한 병일.
『너와 내가 여기 남아 민족자존의 길을 같이 모색하는 거지. 우리 민족을 배방하는 그누구도 있어선 안돼. 모두가 모여 우리 민족이 살길을 찾으려한다면 미국의 위험천만한 의도도 봉쇄할 수 있어. LA에 가지마. 같이 죽자구』
선문답일 수도 있었다. 술주정일 수도 있었고, 취중진담일수도 있었다. 밤이 깊어 갔다. 그들의 설왕설래는 오래 계속 되었다.
설왕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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