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물」속이고 줄이기 운동(송진혁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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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공직자들이 공개한 재산을 보고 기죽을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선거에 몇억 몇십억을 쓰는 정치인들은 그렇다치고 장관이나 청와대수석이라면 대부분 20∼30년 경력의 월급쟁이 출신들인데 이들의 재산이 평균 10억원대라니 이정도 재산을 못가진 비슷한 경력의 일반 월급쟁이들로서야 기가 안죽을 수가 없다. 게다가 이들 공직자들은 윗물맑기와 청렴·도덕성을 가장 강조하는 김영삼정부에 발탁된 인물들이다. 일반 월급쟁이들보다는 청렴·도덕성에 있어서도 월등하기에 발탁됐다는 얘기 아닌가. 그러니까 일반 월급쟁이들로서는 청렴·도덕성에서도 눌리고 재산마저 꿀리니 심정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다.
○청렴·치부를 겸비하니
뿐아니라 이들의 재산이 평균 10억원이라지만 그것은 이들이 새시대 공직자답게 「지극히 겸손하게」 자기네 재산을 밝혔기 때문이지 실제로는 20억원은 되리라는 얘기들이 많다. 사실 이들은 어찌 겸손하던지 5억원짜리를 2억원이라고 하기도 하고,2만원 나가는 주식을 5천원으로 계산하기도 했다. 뿐아니라 어떤 고위층은 스케일이 하도 커서 그런지 억대의 아들재산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추가로 공개하는 자상한 일면을 보이는가 하면 살 수 없는 절대농지를 복덕방에 속아서 산 「순진한」장관도 있다. 청렴의 모범을 보이고 부패추방을 열정적으로 지도할 이들이 설마 투기를 했을리는 만무하겠지만 아무연고도 없어 보이는 타도에 이런저런 부동산을 갖고 있고 요지에 땅과 점포를 갖고 있음은 오로지 선견지명이랄까 출중한 능력 탓인지 모른다. 이런 선견지명도,능력도 못가진 일반 백성들은 그래서 더욱 자신의 졸렬과 무능을 탄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에 비해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그분들을 본받아 치부전선으로 뛰어야 할까,아니면 이런 공직자들이 자기재산을 그렇게 알차게 늘린 그 수완으로 국민재산도 늘려주길 기대하면서 쳐다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가.
보통 상식으로는 청렴하면 치부하기 어렵고 치부하면 청렴하기 어려운 법인데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것은 상당수 공직자들이 무슨 재주로 청렴과 치부를 쌍전할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보통 월급쟁이도 20∼30년 하다보면 이리저리 이사도 여러번 다니고 아파트당점에 팔고사기도 하며 푼돈을 아껴 이른바 재테크에도 손대고 하면 그럭저럭 몇억원짜리 집하나,몇천만원 저축 등은 가질 수도 있다. 여기에 상속을 좀 받거나 운좋게 헐값에 사둔 땅이 금싸라기가 되는 횡재를 만난다면 5억원대를 넘어 10억원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규모 문제지 10억원이 아닌 20억,30억원이 되고 그런 재산이 형성된 합리적 설명이 없다면 그의 치부과정은 의심을 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실명제 신중론 알만해
흔히 상식적인 짐작으로는 남보다 월등한 재산을 갖자면 유별난짓과 남이 알면 낯뜨겁고 거북한 과정이 있게 마련 아닌가.
재산규모도 규모려니와 더 심각한 문제는 정직성이다. 규모가 좀 크더라도 감추거나 줄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만 밝혔던들 그리 큰 문제가 안될 수도 있다. 실은 왕년에 몇건 했더니… 하고 씩웃는다면 봐줄 수도 있는 문제다. 한건 못하면 바보라는게 왕년의 윤리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이번 재산공개를 보면 정부·여당 내부에서 왜 실명제를 꺼려하는지 사정을 알만하다. 국민을 보고 개혁,개혁하지만 실은 개혁대상이 누군지를 온세상이 알게 됐다.
재산문제에 관한 한 윗물맑기는 커녕 윗물감추기·윗물속이기·윗물줄이기의 모범을 한바탕 보여줬을 뿐이다.
공직사회의 도덕성을 높이고 깨끗한 정부를 만들어 보자는 재산공개가 결과적으로 많은 의혹과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다. 당정의 요인들이라면 바로 개혁의 중앙사령부를 구성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이 이런 의혹과 비도덕성의 요소를 안고 있어서야 개혁이 제대로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와서 이들의 재산을 실사해보라든가,엉터리 공개자는 목을 치라든가 하는 말을 하기도 역겹다. 새정부가 들어선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도덕성문제로 인사파동을 겪을 것인가.
○재산·공직중 한가지를
다만 자기들이 그런 재산을 못가진 보통사람들한테 더 청렴하고 더 도덕성이 있어서 요직에 앉았다는 말만은 부디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고위공직자의 재산공개가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고 필요한 제도라는데는 아무도 이론이 없는 만큼 이번의 역효과를 거울삼아 그본 뜻을 살릴 수 있도록 법도 만들고,기준도 정하고 감추고 줄이면 혼을 낼 수도 있는 방법을 강구해 주기 바란다. 기왕 할 바에야 제대로 하는게 옳다. 그런 법이 싫고 재산을 공개하는 것이 꺼림칙한 사람이라면 아예 공직을 맡지 않는게 좋다. 이번에 감추고 줄이고 속인 사람들의 공직생활을 두고두고 국민의 따가운 눈총이란 보답을 받을 것이다.<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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