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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발길 뜸해진 경제부처/세상달라지고 있다(새바람 개혁바람: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기업들도 섭외예산 대폭 삭감/“원칙대로” 경직행정 우려론도
경제부처가 밀집해 있는 과천 정부제2종합청사의 변화는 우선 각 기업체 섭외담당 임원들의 출입이 뜸해진데서부터 찾을 수 있다.
섭외담당은 기업과 정부의 연결고리를 맡는 우리나라 기업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직책. 정부가 기업의 사활에 관련되는 중요한 역할과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각 기업들은 일찍부터 「똑똑한」 사원을 골라 「공무원 모시는 일」을 맡겼으며 이들이 여유있게 일할 수 있도록 구매담당 업무와 겸직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예전에는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1주일에 2∼3번은 들러 세상 얘기며 업계 돌아가는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는데 요즘 국장급들은 아예 찾아오지 말라고 퇴박을 놓고 일반 직원들도 대하는 태도가 옛날같지 않습니다.』
○“찾아오지말라” 퇴박
국내 굴지의 H사에서 섭외담당을 하는 K이사는 이처럼 달라진 분위기도 그렇거니와 주머니 사정도 예전같지 않아 좀처럼 과천을 찾기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최근 공무원 섭외비를 아예 없애버렸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는데 과거와 같은 형태로 섭외를 했다가 오히려 부작용이 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다보니 빈손으로 가 커피 얻어마시고 나오는 것도 한두번이지 가끔 점심때 식사라도 대접해야 할텐데 그럴 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자연히 발걸음이 멀어지더란 것이다.
점심시간 청사 주변의 모습도 얼마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단체 손님으로 만원을 이뤘던 인근 대형 불고기집은 장사가 예전만 못하게 됐고 그대신 새로 개업한 뉴코아백화점 지하 스낵코너 스탠드에는 2천∼3천원짜리 칼국수·비빔밥을 즐기는 국장급이상 고위공무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청사 구내 간부식당도 점심시간에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만원이다.
『오히려 홀가분해진 느낌입니다. 오해받을 일이 줄어들게 됐고 그만큼 소신있게 일처리하기도 쉬워지지 않겠느냐는 생각입니다.』
C부처 Y국장은 그러나 이런 분위기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려면 무엇보다도 주변 여건이 같이 변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무원들의 지출명세서에는 그동안 월급만으론 감당할 수 없는 항목이 적지않았다.
부하직원들의 시간외 근무때는 야식비라도 보태주어야 하고 관계기관과 업무조정을 부드럽게 하려면 저녁 한끼라도 같이 해야 하며,이밖에 「자기 나름대로 관리해야 할 사람」이 많아 결국 부모 또는 처가 덕을 보거나 돈많은 친구가 없을 경우 기업체 섭외담당의 「도움」을 받게 마련이었다.
이때문에 말썽 없이 끌어다 개인적으로 착복을 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잘 푸는 사람이 「일잘하는 공무원」으로 통할 수 있었다.
○관행도 함께 변해야
따라서 이제까지의 「관행」이 함께 바뀌어지지 않는 한 지금의 달라진 분위기는 과거 새정권이 들어설때마다 경험했던 것과 똑같이 일과성에 그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기업체 섭외담당들이 과천청사를 찾는 일은 앞으로 더욱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오는 22일 「신경제 1백일계획」을 발표하면서 기업활동을 저해하는 경제행정규제를 대폭 완화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고 해서 기업의 일하기가 예전보다 더 편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공무원들과의 인간적 친분관계 덕분에 이제까지는 법규나 규정에 약간 미달돼도 일은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규제가 완화되는 대신에 원리원칙을 철저히 따질 경우 기업은 일하는데 오히려 더 피곤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D사 섭외담당 H상무의 이같은 우려는 지방에 있는 중소기업일수록 더욱 현실성있게 들리고 있다.
경제규제가 완화되면 이제까지의 인·허가 사항가운데 상당부분이 기업 자율에 맡겨진 뒤 위반사항을 적발해 나가게 될텐데 아무래도 대기업에 비해서는 중소기업이 「피할 것은 피해가고 가릴 것은 가려 나가는」 능력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아무리 행정규제가 완화된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규제내용이 워낙 복잡해 법규를 충실히 지키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돼있습니다.』
○법만 따져서는 곤란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K사장의 이같은 우려는 16일 이경식부총리가 주재한 기획원 국·실장회의에서도 거론됐다.
기업인과 「야합」인상을 주지않으려고 공무원들이 『법대로 하자』고 나갈 경우 기업활동을 활성화 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규제완화대책이 자칫 경직적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정부의 개혁바람은 그동안 문제가 됐던 기업인과 공무원간의 유착관계를 끊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법규를 운용하는데 성패가 달려있는 셈이다.<한종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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