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혹스런 사재대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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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조훈현9단이 코트깃을 세우고 쓸쓸한 모습으로 소공동 롯데호텔의 현관을 쫓기듯 나가고 있었다. 이때 필자와 함께 호텔 로비에서 사람을 기다리던 우쑹성 (오송생) 9단이 『기분나빠!』하고 불쑥 내뱉었다.
국제신사로 소문난 오9단의 인품으로 미루어 보거나 평소 다정하게 지내는 두 사람의 사이로 보아 뜻밖의 발언이어서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지만 알고 보니 오9단의 진의는 그것이 아니었다.
조9단은 그때 「제4기 동양증권배세계바둑선수권전」준결승 3번 승부 제1국을 제자 이창호6단에게 역전패 당하고 혼자 행사장을 빠져나가던 중이었고, 그 며칠 전 큰 기전 중 하나인 기성타이틀을 역시 이창호에게 빼앗긴바 있어 오9단은 승부세계의 냉혹·비정함을 새삼 통감하고 조9단의 시련을 애석해하며 『가슴아파!』한국어가 서툰 탓으로 『기분나빠!』 로 잘못 표현했던 것이다.
약 1년6개월 전 오9단과 필자는 무역센터에서 발바닥을 지압하는 기구를 하나씩 샀었는데 그것을 시험해 본 오9단의 감탄은 『아, 맛있다』 여서 일행이 폭소를 터뜨렸던 기억이 난다.
『한국어 정말 어려워』그가 자주 토해내는 비명이다.
오9단은 『조훈현은 세계적 고수야. 아직은 더 버텨야 하는데 왜 이창호에게 자꾸만 지는지 모르겠어. 바둑의 내용은 항상 좋은데도 말이야』라며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양 안타까워하기도.
그런 점에서는 조치훈9단에게 결승티킷을 빼앗긴 중국의 녜웨이핑 (운위평) 9단도 마찬가지다.
서·호 두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우세한 바둑을 내리 역전패 당해 탈락했으니 말이다.
심리적으로 흔들린 것이 그들의 패인으로 분석된다. 바둑은 외로운 자기투쟁이며『눈앞의 적은 단칼에 베어버리면 그만이지만 내 마음속의 적은 칼로도 어쩔 수 없구나…』 라는 어느 옛 검객의 탄식처럼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결과라고나 할까.
동양증권배 제2국에서도 좋은 바둑을 공연히 속전속결을 서두르다 또다시 자멸한 조9단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자위가 붉게 물들어 보는 이를 숙연하게 했다. 복기를 마친 다음에도 퇴장하지 않고 국후 검토를 2시간동안 지켜 보다 조9단과 어울려 어디론지 장소를 옮겨갔다.
조· 이 두 국민적 영웅은 그날 저녁 어떤 내용의 대화를 나누었을까.
씨름 등 운동경기와는 달리 바둑은 선수의 수명이 길어 사제간에 샅바를 맞잡고 겨루어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흔히『스승을 이기면 사은에 보답했다』고 하지만 이창호는 너무 철저하게 보답하는 편이다.
서9단도 사람이라 곤혹스러울 것은 인지상정일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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