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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교육혁명 중] 4. 학교가 못하면 기업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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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들이 기부금 1억달러를 몰고 왔다."

지난해 9월 미국에선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시카고대 입성에 시선이 쏠렸다. 도요타가 일본에 세운 도요타공업대(TTI.Toyota Technological Institute)가 명문 시카고대에 대학원(TTIC)을 개원한 것이다. 도요타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컴퓨터과학.정보기술(IT)의 기초이론을 연구하고 고급인력을 양성한다는 계획이다.

도요타는 막대한 돈을 들여 왜 일본도 아닌 미국에 대학원을 세웠을까.

"IT 분야를 키우려는데 세계적 수준의 교수들이 일본에 오지 않으려 하니 그들이 있는 곳으로 우리가 간 것이다."

일본 나고야(名古屋)시 도요타공업대에서 만난 기시다 도시히코(岸田俊彦.64.상무)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사람이 오길 기다리지 않고 대학이 사람을 찾아 나선다는 '역(逆)발상'을 한 것이다.

그는 "IT의 선두는 미국이다. 아예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원을 세우자는 발상이 2000년 대학 이사회에서 최종 결정됐다"고 설명했다.

도요타는 예상대로 우수 교수를 모셔오는 데 성공했다. 인공지능 분야의 권위자이자 MIT 교수와 AT&T 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했던 데이비드 매컬리스터를 스카우트했다. 그의 논문은 세계 체스 챔피언인 개리 카스파로프를 무찌른 IBM 수퍼컴퓨터 '딥 블루'의 설계에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즈 메달(fields medal)' 수상자 등 총 7명의 쟁쟁한 교수들도 합류했다.

이제 기업이 학교가 배출하는 인력을 군말없이 받아쓰던 시대는 지나갔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특정 분야의 인재를 스스로 키워내려 한다. 과거엔 사회공헌 차원이 주류였지만 요즘은 고급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의 공급자로 역할을 넓히고 있다. 미국에선 기업이 인재 양성을 위해 만든 2, 4년제 대학이 7백여개나 된다. 도요타 외에 스웨덴의 볼보도 대학원 수준의 기술인력 양성학교를 미국에 두고 있다.

돈벌기도 바쁜 기업이 왜 교육에 발을 들여놓는 것일까. 한 마디로 기존의 학교가 기업이 기대하는 인재를 제대로 공급해 주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규제가 우리만큼이나 많다는 일본에서도 기업들이 공교육 분야로까지 발을 넓히고 있다.

일본 군마(群馬)현에 있는 인구 15만명의 오타(太田)시. 후지중공업.프랑스의 미쉐린 등이 들어선 공업도시다. 브라질인 근로자가 많고 기업들의 해외 거래도 활발해 국제도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도쿄도 아닌 이곳에 2005년 4월 모든 교육을 영어로만 하는 사립 초.중.고교가 생긴다. 지역 기업들이 주도한다. 일본어를 쓰는 시간은 국어(일본어)뿐이다. 또 올 봄부터는 취학 전 아동을 대상으로 영어교육을 한다.

오타시는 지난해 일본 정부에 '영어교육특구' 지정을 신청해 인정받았다. 이에 따라 지방의 특성이나 수요에 부응하는 교육을 위해서라면 이런저런 규제를 없앨 수 있다. 그래서 영어로만 가르치는 학교가 가능해진 것이다.

오타시와 지역 기업들이 특구 안에 세우려는 학교는 '오타 국제아카데미'란 사립학교다. 수업료는 공립의 두 배 이상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고교까지 줄곧 원어민 교사에게 영어를 배우게 해줄 계획이다. 청소년들에게 국제적인 안목을 키워주겠다는 취지다. 기업과 지역 유지들은 학교법인에 14억엔을 출자해 학교 운영에 직접 참여할 계획이다. 시미즈 마사요시(淸水聖義) 오타 시장은 "영어 실력을 갖추지 않는 한 기술.생산력만으로는 세계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 교육의 변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해 5월 구조개혁특구개정법에 따라 특구 내의 기업이 학교법인을 만들지 않고서도 학교 경영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이 법에 따라 오카야마(岡山)현의 교육특구에 세워진 아사히주쿠(朝日塾)중학교를 찾아가보자. 학원을 경영하는 주식회사 아사히학원이 폐교를 인수해 설립한 학교다. 교육 목표는 간단명료하다. '영어 등 주요 과목 수업시간을 일반 공립고보다 1.43배 늘려 상위권 고교 합격자를 낸다. 독자적인 커리큘럼으로 학력을 향상한다 '. 공부를 많이 시켜 좋은 학교 보내주겠다는 것이다. 규제를 의식한 군더더기가 없다.

물론 일본의 교육 전문가들은 "기업의 학교 운영이 교육의 질을 떨어뜨릴지 모른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학교법인이 운영하는 학교엔 정부.지자체의 보조금이 지급되지만 기업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조금을 포기하더라도 자율을 택해 앞서가겠다는 것이 기업들의 생각이다.

한국도 이를 참고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교육특구를 만들 예정이다. 특구가 도입되면 평준화 체제 속에서 굳게 잠겼던 학교 선택의 문이 서서히 열리게 된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방향은 제대로 잡은 셈이다. 언제까지 빗장을 걸어놓고 버틸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특별취재팀=정책기획부 김남중.강홍준.이승녕.하현옥 기자, 오대영.김현기 도쿄특파원, 오병상 런던특파원, 이훈범 파리특파원

<사진설명>
'일본 교육특구 1호'로 승인된 오타(太田)시가 지난해 돌린 '영어교육 특구'홍보물. 오타시와 지역 기업들은 내년부터 초등학교부터 고교까지 일관되게 이뤄지는 영어교육을 통해 국제적인 마인드를 지닌 인재를 기르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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