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선거, 인간을 타락시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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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만일 당신이 요즘 날마다 벌어지는 한나라당 이명박, 박근혜 후보간의 싸움과 ‘재산 검증’ 시리즈를 지켜보며 “이게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이야 아니면 미국 선거도 마찬가지야?”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됐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유하겠다.

 만일 당신이 특정 후보의 선거 참모여서 상대편 후보를 완전히 박살 낼 비법을 찾고 있다면 이 책은 유용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대편의 중상모략으로부터 후보를 지켜내야 할 책무가 당신에게 있다면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미 조지아주 케네소 주립대학 정치학 부교수가 쓴 이 책은 미국 선거 기록이다. 모범적이고 잘 된 선거에 대한 게 아니다. 악명 높고 끔찍한, 더럽고 치욕스런 선거전 기록이다. 시장에서 주지사, 대통령 선거전까지 책에서 소개된 25개의 사례들은 황당하다. “우리보다 더 하잖아”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민주주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에 대해 기대감이 컸다면 실망할 정도다.

 지은이가 주장하는 핵심은 이렇다. “속지말자. 사람들은 네거티브 선거 캠페인을 좋아한다.”

 유권자들은 흔히 “정치판의 추악한 중상모략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면 선거에서 중상모략이 난무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고 스윈트는 말한다.

 이 책에 소개된 사례들은 일종의 명작(greatest hits) 컬렉션이라고 할 수 있다. 단 저명(famous)이 아니라 악명(notorious) 순으로 따져 상위 25위까지다. 순위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사례 하나 하나가 독특하고, 나름대로 생각할 ‘꺼리’를 준다.

 TV를 이용한 네거티브 캠페인은 민주당 린든 존슨과 공화당 배리 골드워터가 맞붙은 1964년 대통령 선거 때 처음 등장했다.

 존슨 캠프는 골드워터가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한 발언을 근거로 그의 ‘호전성’을 부각시킨 광고를 제작했다. 데이지 꽃잎을 따며 놀던 순진한 어린 소녀의 눈망울에 핵 폭발의 버섯구름이 투영되는, 그 유명한 ‘데이지 걸’광고다. 광고는 9월 7일 CBS의 월요일 밤 영화시간에 딱 한번 나갔다. 하지만 너무 충격적이어서 방송사에 전화가 쇄도했다. 존슨 진영은 이 광고를 다시 내보내지 않았다. 그래도 신문과 방송들이 연일 광고의 파장을 보도해 매일 광고를 한 것과 마찬가지가 됐다. 골드워터는 이 광고 한방에 날라가 버렸다.

 자기 발등을 찍은 후보도 있다. 98년 뉴욕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다. 공화당 알폰스 다마토 상원의원은 도전자인 민주당 찰스 슈머 하원의원을 “putzhead (남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저속한 단어) “라고 말하고 다녔다. 언론이 묻자 발언을 부인했다. 나중에 사과했지만 언론은 용서하지 않았고 다마토는 ‘천박한 자’라는 이미지가 각인되면서 선거에서 졌다.

 선거는 악마와 같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만큼 이기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다 쓰게 된다. 결국 인간을 타락시킨다. 1876년 미국 건국 100년째에 벌어진 대통령 선거에선 오하이오 주지사인 공화당 러더포드 헤이스와 뉴욕 주지사인 민주당 새무얼 틸든이 격돌했다. 둘 다 뛰어난 인격자였다. 하지만 선거는 ‘개판’이 됐다. 무엇보다 참모들이 가만 놔두질 않았다. 유권자 매수, 협박, 사기와 기만 등 온갖 종류의 부정선거가 자행됐다. 결국 헤이스가 이겼지만 그는 선거에 환멸을 느껴 재선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깨끗하기만 한 선거는 없다. 200년 이상 선거를 치러온 미국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요즘 벌어지는 우리네 정치판에 너무 실망하지 말자. 불안정한 자여, 그대 이름은 민주주의다.

네거티브 선거 캠페인

자신이 상대 후보보다 나은 점을 홍보하거나 정책대결로 표를 얻으려는 포지티브 캠페인과 달리, 상대 후보의 개인적 결점이나 실수를 집중 공격하는 선거방법이다. 후보들의 자질이나 경력에 대한 ‘검증’과 구분하기 어려워 선거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선거운동 방법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실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근거없는 사실을 조작하여, 상대편을 중상모략하거나 그 내부를 교란해 표를 깎아먹는 ‘흑색선전’과 구분된다. 또한 네거티브 캠페인은 통상 선거운동 기간 중 벌어지지만 흑색선전은 반론의 기회를 없애기 위해 투표일 직전에 집중 실시되는 점도 차이라면 차이다.

상위 25위

책에 실린 ‘최악의 네거티브 캠페인 사례’ 25개 중 대선과 관련된 것은 10건이다. 20세기 이후 사례만 보면 ▶2004년 조지 W.부시 대 존 케리(25위) ▶1964년 린든 존슨 대 배리 골드워터(22위) ▶1972년 리처드 닉슨 대 조지 맥거번(10위) ▶1988년 조지 H.W. 부시 대 마이클 듀카키스(8위) 4건이다. 이 중‘호튼 광고’를 이용해 듀카키스를 “갈기갈기 찢어 놓은” 1988년 사례는 미 정치사에서 네거티브 캠페인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꼽힌다.

호튼 광고

매사추세츠 주지사였던 듀카키스는 죄수 주말 휴가제도를 지지했는데 윌리 호튼이란 살인범이 이 제도를 이용해 납치강간을 자행했다. 부시 진영은 이 사건을 소재로 TV광고를 만들며 ‘유괴’ ‘칼로 찌름’ ‘강간’이란 큰 자막을 넣어 듀카키스가 흉악범에게 휴가를 주어 범죄를 저지르게 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듀카키스에게 ‘유약한 진보주의자’란 딱지를 붙이려는 의도였다. 이어진 ‘회전문 광고’ 등으로 듀카키스를 공격한 끝에 부시는 선거인단 투표에서 340표 대 218표로 압승을 거두었다.

김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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