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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시시각각

관치 자초하는 문화예술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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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전신은 한국문예진흥원이다. 관치(官治)의 그늘에서 벗어나 민간 자율기구로 탈바꿈한다는 명목으로 2005년 8월 새롭게 출범했다. 예술가는 물론 일반 국민도 문화예술위의 발족 취지에 공감하고 환영했다. 초대 위원장에 저명한 문학평론가 김병익씨가 선출된 것도 기대를 부풀렸다. 이제야말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시대가 열렸다고 반가워했다.

 그런데 2년도 못 돼 김병익씨가 위원장 직을 사퇴(7월 9일)하는 파행이 빚어졌다.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최근 ‘원월드 뮤직 페스티벌’을 둘러싸고 위원회 운영이 원활치 못했던 데 책임지기 위해서라고 한다. 주변에서는 김씨의 건강이 심각할 정도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원월드 뮤직 페스티벌이 직접적인 동기일 것이다. 도대체 무슨 행사이기에?

 원월드 뮤직 페스티벌은 남미·아프리카·유럽의 아티스트들이 참가하는 큰 규모의 월드뮤직 행사다. 10월 5일부터 사흘간 경기도 이천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문화예술위 사무처가 예산이 10억원이나 드는 행사를 최고 의결기구인 11인 위원회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고, 행사 내용도 문화 소외지역을 돕는다는 예산 배정 목적에 어긋난다고 일부 위원이 반발하면서 파행이 시작됐다. 위원 중 한명희 전 국립국악원장은 5월 17일 서울중앙지법에 공연행사 추진중지 가처분신청을 내는 등 이 문제를 두 차례나 법원에 가져갔다. 안에서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가 소송이라는 ‘비(非)문화적’ 사태로까지 번졌으니 김병익씨가 골머리를 앓았을 법도 하다.

 그럼 일개 음악행사의 개최 여부가 사태의 본질일까. 아니다. 문화예술위의 잘못된 시스템과 위원들의 장르 이기주의, 일부 ‘개성 강한’ 위원의 집념이 두루 작용했다. 5월 4일 열린 문화예술위 회의록을 보면 김병익 위원장이 사표를 던진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문화예술위의 11인 위원회는 위원장과 심재찬 사무처장, 그리고 예술 장르별 9명의 위원으로 구성돼 있다. 11명 중 9명이 5월 4일 서울 동숭동 문화예술위 건물 3층에서 제32차 회의를 열었다. 무려 5시간 가까이 격론이 벌어졌다. 회의록을 읽어본 소감은 한마디로 “가관이군”이다. 서민들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구입한 로또 복권 기금을 포함, 연 1000억원을 운용하는 국내 최대 문화예술 지원기구의 회의석상이다. 이 자리에서 어떤 위원은 출장비 타령을 하며 사무처를 질타한다. “내가 천만원도 안 되는 몇 백만원 출장을 가겠다고 그러니까, 예산 항목이 없어서 못 간대. 2월 말부터 오죽 답답해서 위원장님을 찾아가 ‘아니, 연초에 예산 항목에 없다고 출장을 못 갑니까?’ 그러니까 예산 항목에 없으면 못 간다고 그러시더라고. 그래서 출장을 못 가고 있다가 내가 고집 부려서 3월 중순께 갔지 않습니까…”

 뮤직 페스티벌 개최를 놓고 설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김병익 위원장이 하소연을 하다 사실상 사퇴 의사를 내비친다. “제가 참 여러 가지로 많이 혼나고 있는 와중입니다. 누가 저를 위해서 변명하실 분이 있으면 해봐 주세요.” “제가 이 회의 전부터, 어제부터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온 건데 최종적인 책임이 위원장으로서의 책임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책임까지 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심각하게 했습니다….” 사퇴는 오래전 예고돼 있었다는 얘기다.

 안 그래도 문화예술위는 문화부와 돈을 대주는 총리실 산하 복권위원회의 입김에 시달려 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월 시행된 공공기관운영법상의 ‘준정부기관’으로 지정돼 앞으로는 기획예산처 관리들이 예술위를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도 정작 위원들은 민간 자율기구의 이점을 살리기는커녕 장르 이기주의에 빠져 갈등만 증폭시키고 있다. 이번 사퇴 파문은 곪았던 게 터진 것에 불과하다. 벌써부터 예술행정 전문가나 경제인·법조인이 문화예술위를 맡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정부 입김이 작용하지 않을 리 없다. 관치에서 벗어나려고 출범한 기구가 도리어 관치를 불러들이는 꼴이다. 우리 문화예술계의 역량이 겨우 이 정도인가.

노재현 논설위원